부산진구 '뒷짐'…재개발조합에 표지석 보관부터 재설치까지 책임 떠맡기고 방관
[더팩트ㅣ부산=조탁만 기자] 아파트 재개발 사업 탓에 부산의 지리적 정중앙에 세워진 ‘표지석’의 위치가 옮겨진다. 이제 더이상 정중앙 표지석이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부산의 정중앙이라는 상징성을 살려 만든 이 표지석 일대는 그동안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 명소로 부상했지만, 앞으로도 명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더욱이 부산의 정중앙이라는 상징성을 강조해 관광활성화를 꾀하려 했던 행정당국마저 이를 방관하고 있어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한 초등학생의 호기심으로 명소가 된 부산 정중앙
부산진구청은 지난 2012년 8월 14일 부산의 지리적 중심인 부암 3동에 ‘정중앙 표지석’을 설치했다.
부산의 지리적 중앙은 2001년 당시 동평초등학교 4학년인 손진화 어린이가 SBS방송 ‘호기심천국’에 엽서 한 장을 보내면서부터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부산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남광우 박사는 지리정보시스템(GIS)를 이용해 부산의 지리적 중앙 지점을 조사했고, 그 결과 부산의 지리적 중앙은 북위 35도10분4초, 동경129도2분17초이며 부산진구 부암3동 548-12번지로 밝혀졌다.
이런 사실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자 부산진구는 발빠르게 이 일대에 ‘부산 정중앙 표지석’을 세우고 작은 공원으로 조성하고, ‘이곳이 우리 부산의 정중앙입니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표지석을 만들었다.
표지석이 만들어지자 이곳은 명소로 급부상했다. 영험한 표지석을 어루만지러 오는 시민들의 행렬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가정에선 건강과 행복, 재물이 늘고, 직장인은 진급을 하고, 학생들은 성적이 올라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승주 전 부산진구약사회장, 정근 온병원 원장 등 지역 정치인들이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기 전 이곳에서 출정식을 가질 정도로 이곳의 위상은 컸다.
◆ 아파트 재개발로 정중앙 위치 바뀌는 표지석
하지만 부산의 정중앙은 이제 더 명성을 잃을 수 있는 위기에 처했다. 오는 2023년 정중앙 표지석이 ‘명칭처럼’ 정중앙이 아닌 다른 곳에 재설치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정중앙 표지석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배경은 이렇다. 롯데건설이 부산시 원도심 중심인 부산진구 부암1구역을 재개발해 짓는 ‘백양산 롯데캐슬 골드센트럴’ 공사장 내 부산 정중앙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부암3동 주민센터와 부암1구역 주택재개발조합은 문제 해결을 위해 협의에 나섰다.
지난 8월 이들은 조합이 공사 기간 중 표지석을 보관하는 동시에 아파트 완공 시 아파트 광장 내 부산 정중앙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협의했다.
문제는 아파트를 짓는 도면상 현재 위치의 부산 정중앙 표지석을 그대로 배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합측 관계자는 "아파트 주거민들뿐 아니라 부산 시민들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아파트 내 조성된 광장에 부산 정중앙 표지석을 재설치할 계획"이라면서도 "다만, 현재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표지석이 세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 표지석 활용 관광활성화 열 올린 부산진구, 사실상 ‘방관’…시민들 ‘불만’
‘부산 정중앙 표지석’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부산진구를 질타하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지역 명소를 홍보하기 위해 부산 정중앙 표지석을 활용해 온 부산진구가 표지석 재설치와 보관 등에 대한 문제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어 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그동안 부산진구는 청사 입구에 부산의 정중앙 표지석과 같은 다양한 지역 명소를 알리는 홍보안내판을 설치해 관광활성화에 열을 올려왔다.
실제 이 표지석을 만진 뒤 좋은 기운을 받아 인생이 달라졌다는 우체국 직원 등 시민 사연을 찾아 스토리텔링을 하거나 어린이대공원 등 관광시설과 연계할 수 있는 방안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 재개발 탓에 이 표지석의 위치가 바뀌게 됐음에도 부산진구는 뒷짐만 지고 있다.
부산진구 관계자는 "구청 차원에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다"며 즉답을 피했다.
더군다나 이 표지석은 아파트 공사기간 3년간 현장 사무실 인근에 잠시 옮겨져 보관되는 등 사실상 공사 현장에 방치되고 있다.
조합측은 "표지석 설치와는 별개로 공사 기간 표지석을 보관해 달라고 구청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청 관계자는 "표지석을 보관할만한 장소가 없다"고 답했다.
부암동 주민 신모(39)씨는 "‘좋은 기운’을 품고 있어 시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던 이 표지석은 앞으로 ‘좋은 기운’을 잃을 수도 있다"며 "아파트 개발 때문에 부산의 정중앙이라는 상징성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게 아니냐"고 질타했다.
또다른 주민 장모(38·여)씨는 "부산의 중앙이라는 지리적 상징이 사라지면 입지 덕분에 ‘좋은 기운’과 연결돼 온 이 표지석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된다"며 "행정기관에서도 신경써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