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800여 년 전 국난 극복과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며 새긴 대장경의 정신이 생명 존중과 인류 평화를 위한 새로운 판각으로 이어진다. 해인사가 전통 판각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하며 50년, 나아가 100년을 내다보는 대장경 조성에 나섰다.
법보종찰 해인사(주지 혜일스님)는 29일 오후 2시 경남 합천 해인사 탑마당에서 ‘대장경 판각 고불식’을 봉행했다고 밝혔다. 고불식은 불사를 시작하며 그 뜻과 서원을 부처님께 고하는 의식이다.
‘다시 새기는 대장경, 인류를 향하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해인총림 방장 학산대원 대종사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진우스님, 혜일스님을 비롯해 불교계와 정부·지방자치단체 관계자, 판각학교 교육생, 신도 등 주최 측 추산 20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판각은 해인사에 보존된 팔만대장경 원본을 대체하거나 외형을 단순히 재현하기 위한 사업은 아니라는 게 해인사의 설명이다. 고려 선조들이 대장경 조성에 담았던 지혜와 정성, 수행의 정신을 오늘날의 가치로 이어가는 데 의미를 뒀다.
혜일스님은 고불식에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지금, 우리는 왜 대장경을 다시 새기는가’라는 화두를 제시했다. 과거에는 전쟁 종식과 나라의 안녕을 염원했다면, 오늘날에는 기후위기와 자연재해, 전쟁과 핵무기 위협,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 등에 직면한 인류의 미래를 돌아보자는 취지다.
혜일스님은 발원문에서 "오늘 우리는 전쟁과 갈등, 기후위기와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 앞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지극한 마음으로 대장경을 판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뜻을 이어갈 인재를 양성하고, 판각에 담긴 정성이 인류의 지속 가능한 행복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발원했다.
해인총림 방장 학산대원 대종사는 법어에서 "오늘 그대들이 든 판각의 칼끝이 나무에 닿을 때, 나무가 깎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대들의 번뇌가 깎이는 것입니까?"라며 판각의 수행적 의미를 강조했다.
해인사는 오랜 시간 나뭇결을 살피고 글자를 새기는 과정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으로 설명했다. 방대한 정보를 빠르게 처리하는 기술의 시대에도 이를 활용하는 인간의 양심과 책임, 생명 존중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장기 불사를 이어갈 인력과 재료 확보도 추진해 왔다. 해인사는 2023년 해인총림 임회 결의로 장경도감을 설립하고 전문 각수 양성과 목재 확보 등 판각 기반을 마련했다.
해인사에 따르면 판각학교에서는 현재까지 스님과 재가자 등 670여 명이 전통 판각법을 배워 왔다. 국가무형유산 및 지방무형유산 각자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교수진이 교육을 맡고 있다. 이날 고불식 이후에는 스님과 강사진, 교육생 등 30명이 전통 판각을 시연했다.
경판의 주요 재료로 사용할 산벚나무 약 300톤도 확보해 제재와 건조를 진행하고 있다. 미래의 재료 수급을 위해 해인사 소유 토지에 돌배나무 2000그루를 심었으며, 산벚나무 식재도 지속할 계획이다.
아울러 약 10만 평의 해인사 소유 토지에는 전통 판각 교육과 경판 조성을 위한 ‘대장경 타운’을 준비하고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기술과 수행 정신을 전하는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고려의 선조들은 몽골 침략에 맞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며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다. 해인사에 보존된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해인사는 새로운 판각 불사를 국내외 시민들이 참여하는 문화·수행의 여정으로 발전시킬 방침이다. 전통기술을 전승하는 동시에, 한 글자씩 새기는 정성을 통해 평화와 공존의 의미를 나누겠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