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연예계는 유명 연예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고 무속인이 됐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30여년간 배우 활동을 하다 무속인의 길을 선택한 배우 정호근, 아역 출신 배우 이건주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자신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해 특별한 길을 택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무속인 가수 파파금파는 연기자의 길을 가길 바라던 어머니의 소망과 아쉬움을 뒤늦게나마 이루기 위해 연예계로 뛰어들었다.
파파금파는 최근 KBS1 '전국노래자랑' 충남 아산시편 공개방송에서 신곡 '부모님 전상서'를 열창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가요무대'에도 잇달아 출연해 윤희상의 '카스바의 여인'과 '부모님 전상서'로 호평을 얻었다.
'부모님 전상서'는 연기자로 성공하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희망을 떠올리며 그가 직접 작사한 노래다. 또 음반을 내고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데는 가요계 선배 조항조와 진미령 등의 조력이 컸다. 덕분에 방송을 탄 뒤엔 트로트 차트에 오를만큼 반응이 빠르게 확산됐다.
그의 또다른 신곡 '오사카의 밤' 역시 직접 가사를 썼다. 이 곡은 어린시절부터 가슴에 담은 아버지에 대한 애환과 그리움을 담은 노래다. 부친은 그가 어렸을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오사카에 거주했다고 한다.
가사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한때 아버지가 살았던 곳을 가보게 됐고, 오사카 도톤보리 강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다 고향의 가족을 그리며 살았을 아버지의 외로움이 울컥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그가 즉흥적으로 쓴 가사는 가요계 절친 선배인 조항조가 새롭게 다듬었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 그리움과 추억은 조항조를 통해 누구나 공감할 대중가요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탄생됐다.
그의 가수 활동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편견과 제약이 뒤따랐다. 정식 음반을 내고 라디오와 케이블TV 등에서 빠르게 호평을 받았지만 지상파 방송 출연은 번번이 제동이 걸렸다.
한때 '가수를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는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어 다시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물론 음악적 실력도 이런 자신감을 뒷받침 했다.
그는 가요계 진출에 앞서 무속인 신분으로 이미 다양한 공연활동을 했다. 미국 카네기홀에서 무속인 가수로 단독 공연을 하고,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아리랑굿 콘서트'에서 황해도 굿을 선보여 찬사를 받았다. 이는 한국 토속 신앙을 새로운 한류로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됐다.
파파금파는 젊은 시절 못다한 꿈을 펼치고 싶어 첨엔 가벼운 마음으로 음반을 냈다가 기대 이상으로 높은 반응을 얻자 차츰 활동 영역을 키워가게 됐다. 그는 "내 노래를 좋아하는 단 한명의 팬만 있어도 활동을 하겠다"는 뚝심으로 마음을 다졌다.
그의 어려서부터 꿈은 연기자였다. 서울예대 연극영화과를 갔던 것도 이 꿈과 희망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알고보니 내면에 숨은 궁극적 욕구는 음악이었다.
꽤 늦은 나이에 대중 앞에 본격적으로 나섰지만 가수 데뷔 이력은 무려 40년에 가깝다. 그는 88년 태광음반 '할말이 있어요'로 데뷔했다. 데뷔 3개월만에 군에 입대하면서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전역 후엔 가수로 복귀하지 못하고 무속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됐다.
그로부터 다시 30년이 흘렀고, 무속인으로 명성을 얻고 입지를 다진 2019년 '인생은 회전목마'로 재데뷔했다. 그는 "나중에 후회할 일이 없도록 가수로서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누구나 살다보면 한 두가지 인생 버킷리스트가 있어요. 꼭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다시 가수로 활동하게 된 것은 못다한 꿈을 채우고 싶어서예요. 더 나이 먹기 전에 후회할 일을 미리 차단하려는 거죠."
그는 "10번을 도전해 1~2번만 뜻을 이뤄도 크게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실패를 두려워했다면 감히 가요계를 다시 노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