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셋 쓰자 성폭력 수형자의 손이 떨렸다…"이건 내 이야기인데요"


VR로 범죄현장·피해자 시점 체험하는 수형자
인지왜곡·공감능력 개선…전국 11개 기관 확대

법무부는 수형자들이 범행 당시 자신의 행동과 피해자의 고통을 현실감 있게 체험하도록 VR 콘텐츠를 개발해 심리치료에 활용하고 있다./법무부

[더팩트ㅣ선은양 기자] 스토킹 범죄 피해자인 한 여성이 세면대 앞에 서 있다. 여성은 입과 손을 몇 번이고 문질러 씻었다. 출근은 했지만 상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듯 하지만 시선은 허공에 머물러있다. 그날의 기억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잠시 뒤 화면이 멈추고 '두려움', '우울', '수치심', '곤란'이라는 네 가지 선택지가 나타났다. 이 여성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고르라는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허공을 가르며 손짓으로 '우울'을 선택했다.

지난 4일 서울 구로구 남부구치소 서울남부심리치료센터에서 <더팩트> 취재진이 체험한 수형자 대상 가상현실(VR) 심리치료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

교도관 옆에 놓인 태블릿PC에는 체험자의 시선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화면 속 어디를 오래 바라보는지, 질문에는 어떤 답을 선택하는지 모두 기록됐다. VR 체험이 끝나면 이 기록은 상담 자료가 된다.

법무부는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인 수형자들이 범행 당시 자신의 행동과 피해자의 고통을 현실감 있게 체험하도록 VR 콘텐츠를 개발해 심리치료에 활용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성폭력·스토킹·가정폭력·아동학대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다.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배우들이 연기한 영상을 활용하며, 범죄 유형별 시나리오는 외부 전문가들이 개발하고 교정당국이 감수했다.

5회기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범죄 상황 인식, 인지왜곡 수정, 감정조절, 피해자 공감, 재범 예방 순으로 진행된다.

수형자는 먼저 제3자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돌아본 뒤, 피해자의 시점에서 범죄가 남긴 고통을 체험한다.

임상묵 교위는 "스토킹 수형자들은 '좋아해서 한 행동'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먼저 자신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인지왜곡을 바로잡은 뒤에야 피해자의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고 설명했다.

VR 심리 치료 프로그램은 성폭력·스토킹·가정폭력·아동학대 범죄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다./법무부

◆자기성찰부터 분노까지 수형자 반응은 다양

가상현실에서 자신의 범죄와 비슷한 상황을 마주한 수형자들은 감정이 크게 흔들리기도 한다.

신성광 교위는 한 성폭력 수형자 사례를 떠올렸다. 평소에도 말을 더듬던 수형자가 VR 체험 도중 손을 떨고 말을 더 심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3~4회기가 지나자 "이건 제 이야기인데요"라고 털어놨다고 한다.

수형자는 생활관으로 돌아간 뒤에서 영상을 계속 곱씹으며 '내가 무엇을 잘못해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처음 생각해 봤다'고 한다.

모든 수형자가 프로그램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다 잊고 있었는데 왜 이런 영상을 보여줘 잠도 못 자게 하느냐"며 분노하는 경우도 있다.

정신질환이 있는 한 수형자는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이냐"며 헤드셋을 벗고 체험을 중단했다.

교도관들은 이같은 반응 역시 치료 과정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억눌렀던 감정과 저항감이 드러난 만큼 VR 직후 상담을 통해 그 이유를 함께 되짚는다는 것이다.

◆ 전국 11개 교정기관 확대됐지만 치료 인력·공간은 과제

약 15분간의 체험이 끝나고 헤드셋을 벗자 다시 작은 상담실이었다. VR 영상은 끝났지만 치료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수형자는 사후 경험일지를 작성하고, 교도관은 이를 바탕으로 범죄 상황에서의 생각과 감정을 다시 짚어 나간다.

이지원 교감은 "VR은 범죄 상황을 직면하게 만드는 하나의 도구"라며 "체험 전후 치료자의 개입과 상담이 함께 이뤄져야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VR만으로 수형자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강한 자극을 준 뒤 이를 집단상담과 개인상담으로 풀어내는 구조다.

법무부는 올해 상반기 9개 교정기관에서 시범 운영한 결과, VR 프로그램을 병행한 집단이 기존 집단 심리치료보다 인지왜곡 개선과 공감능력 향상 등에서 더 높은 효과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달부터 전국 11개 교정기관으로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고 있다.

다만 현재 확인된 효과는 프로그램 직후 인지와 감정 변화다. 실제 재범 감소로 이어지는지는 출소 이후 장기간 추적해야 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통상 3년 단위로 재범 여부를 조사하는 만큼 실제 효과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현장에서는 또 다른 과제도 꼽았다. 프로그램이 확대되더라도 이를 운영할 사람과 공간이 부족하면 치료 효과를 충분히 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취재진이 체험한 센터에는 치료 인력 9명을 포함해 12명이 근무하고 상담실은 3개뿐이다.

센터 관계자들은 VR은 결국 상담과 함께 이뤄질 때 효과를 발휘하는 만큼 전문 치료 인력과 시설 확충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교도관들은 "VR은 어디까지나 시작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 헤드셋을 벗은 뒤 이어지는 상담과 반복되는 치료가 결국 한 사람이라도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사회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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