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영봉·이윤경 기자] 서울시청 인근에서 차량을 몰다 인도로 돌진해 9명을 숨지게 한 60대 운전자 A 씨가 급발진으로 사고가 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사고 차량 감식을 의뢰했지만 급발진 여부를 규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됐다 자동 폐기된 '제조물책임법 일부법률개정안' 필요성도 제기된다.
3일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따르면 A 씨는 지난 1일 오후 9시26분께 제네시스 차량을 타고 서울 중구 태평로 시청역 인근 호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뒤 일방통행 도로를 역주행하다 횡단보도로 돌진, 신호를 기다리던 보행자들을 잇달아 들이받았다.
A 씨 측은 사고 원인을 급발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차량에 동승했던 60대 배우자 B 씨는 사고 직후 주변인들에게 차량 급발진으로 사고가 났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A 씨는 경기도 안산 소재 모 버스운수업체에 소속된 시내버스 기사로 밝혀졌다. 사고 경력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경찰은 "급발진 근거는 A 씨 측 진술뿐"이라며 차량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정밀감정 의뢰했다. 자동차 사고기록장치(EDR) 분석도 실시한다.
문제는 급발진 여부를 규명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과수에 따르면 지난 2018월부터 올 6월까지 급발진 의심 사고 감정 건수는 총 471건이다. 이중 급발진으로 인정한 사례는 없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지난 2010년부터 올 5월까지 약 15년간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건수는 총 793건으로 집계됐다. 이중에서도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으로 확인된 사례는 없다는 게 한국교통안전공단 측 설명이다.
이에 일각에선 제조물책임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은 제조물의 결함(급발진) 발생 시 입증책임을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가 지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은 지난 21대 국회에서 발의됐다. 2022년 12월 강원도 강릉에서 KGM의 티볼리 차량에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12살 도현 군이 숨졌다. 이를 계기로 발의돼 일명 '도현이법'으로 불린다. 하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자동 폐기됐다.
전문가들은 급발진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입증책임을 제조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경일 법무법인 엘앤엘 대표변호사는 "서울시청 인근에서 발생한 사고 운전자가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소비자가 급발진을 입증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며 "적어도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입증책임은 제조사에 넘겨야 소비자와 제조사가 대등한 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변호사는 "사실 사고 운전자 중에도 급발진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제조사가 급발진 의혹을 풀 수 있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만큼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입증책임은 제조사가 지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국과수가 그동안 차량 급발진을 인정한 사례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과수에서 급발진 근거로 분석하는 EDR이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 본다"며 "블랙박스 영상과 맞지 않는 EDR이 너무 많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앞서 도현 군 사고 원인을 분석하던 국과수도 급발진 여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조사로부터 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며 도현이법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현재 도현이법은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올라와 있다. 도현 군 아버지 이상훈 씨가 지난달 14일 국민동의 청원을 촉구한 것이다. 지난 2일 오후 5시 기준 6만4560명이 청원에 동의하면서 청원 충족 요건인 5만명을 뛰어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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