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황지향·이윤경 기자] #. 지난 13일 오전 9시30분 서울 A 대학교 의대는 한산한 모습이었다. 오전 9시부터 11시50분까지 융합과학및의료인문학 수업이 예정된 한 강의실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의예과 2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지만 의대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대학 의대는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한 학생들의 휴학 신청에도 지난 4일 개강했다. 휴학계가 정식 절차를 거쳐 제출되진 않았지만 학생들은 집단 수업 거부 중이다. 10층짜리 의대 건물에는 대학원생과 연구원 등만 한두 명 돌아다닐 뿐 의대생은 만나볼 수 없었다.
교내 게시판은 멈춰버린 상황을 말해주듯 지난해 2학기 기말고사 관련 공지가 그대로 붙어있었다. 실습실도, 의대 도서관도 텅 빈 상태였다. 건물은 간혹 지나가는 연구원의 발소리로만 채워졌다.
휴학 신청이나 수업 거부 등 의대생 집단행동이 이어지면서 대학은 개강을 연기하거나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는 등 집단유급을 막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하지만 학사일정 조정에 한계가 있는데다 정부의 집단휴학 불허 압박까지 거세지면서 결석 처리로 유급 현실화가 우려된다.
◆ 개강 아무리 연기해도 4월 말엔 수업해야 하는데
14일 대학가에 따르면 서울 일부 대학은 의대 학사일정을 연기한 것으로 파악됐다. 학생들이 휴학 신청이나 수업 거부 등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대는 내달 1일로 의대 개강을 연기했다. 성균관대는 오는 25일 개강하며, 동국대는 18일과 25일 각각 실습과 이론 수업을 시작한다. 고려대와 건국대, 이화여대 등도 의대 개강을 미뤘다.
각 대학은 학칙에 총장이 교무운영상 필요한 경우 학기 개시일과 개강일을 따로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다만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11조는 학교의 수업일수를 매 학년도 30주 이상으로 규정한다. 각 대학은 한 학기 수업일수를 최소 15주 이상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대학들은 2학기 학사일정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개강을 마냥 미룰 수 없다. 여름방학을 없애고 8월 말까지 수업한다고 가정하면 5월20일 수업을 시작해도 수업일수를 채울 수 있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빡빡한 수업을 해야 하는 일정이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부담이다. 수업일수를 확보하면서 원활한 학사운영을 위해서는 늦어도 4월 말에는 개강해야 집단유급을 막을 수 있다.
서울 모 사립대 의대 관계자는 "언제까지 개강을 미룰지는 결정되지 않았다"며 "방학 기간을 제외하고 2학기 학사일정까지 고려해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벌써 개강 연기만 4번째라고 했다. 또 다른 의대 관계자는 "연기된 이후에도 학생들이 나오지 않을 경우 학사일정을 다시 조정할 예정"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유급 사태는 막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 출결 관리 위해 비대면 수업 진행하기도
이미 개강해 학사일정을 운영 중인 대학은 당장 비상이 걸렸다. 연세대와 경희대, 한양대 의대는 지난 4일 개강했다. 하지만 이번 주와 다음 주 휴학 신청 마감일이 다가오면서 난색을 표하고 있다.
학생들이 절차에 맞게 휴학을 신청할 경우 납부한 등록금은 반환된다. 문제는 절차에 맞지 않는 휴학 신청 이후 수업 거부로 단순 결석으로 처리될 경우 유급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통상 대학들은 수업일수의 4분의 1 또는 3분의 1을 초과해 결석하면 F 학점을 부여한다. 의대는 F 학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유급 처리한다. 휴학 신청 마감일이 지나 결석에 따른 F 학점으로 인해 유급될 경우 등록금은 돌려받을 수 없다.
일부는 비대면 수업 등을 진행하며 유급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실시간이 아닌 정해진 기간 내 강의를 들어도 출석이 인정되는 비대면 수업으로 추후 돌아올 학생들의 출결을 관리해 유급을 막겠다는 의도다.
A 대학 의대 교수는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아 유급이 되면 곤란하다"며 "비대면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늦게 돌아오더라도 언제든지 출석이 인정되도록 강의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있다"고 설명했다.
◆ 교육부는 "집단행동에 따른 휴학 불허"
정부가 의대생 집단휴학 사실상 불허 방침을 정하면서 대학들의 고민은 더 커졌다. 교육부는 지난 11일 전국 40개 의대에 공문을 보내 "대학별 대규모 휴학 허가 등이 이뤄지는 경우 대학의 의사결정 과정 및 절차에 대해 점검 등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전날 열린 전북대 관계자와의 간담회에서 "학사운영 정상화를 위한 노력과 더불어 학생들의 집단행동으로 인한 휴학은 허가하지 않도록 해달라"며 "그동안 거듭 강조해온 바와 같이 집단행동인 동맹휴학은 휴학의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반면 의대생들은 대학에 휴학 신청 승인을 요청하고 있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는 "지난 9일 임시총회 결과 가장 먼저 휴학계가 수리되는 학교의 날짜에 맞춰 40개 모든 단위가 학교 측에 휴학계 수리를 요청한다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날 기준 휴학을 신청한 의대생은 누적 5954명(31.7%)으로 늘었다. 전날 하루에만 511명이 추가로 휴학을 신청했다. 정부가 집계에서 제외한 학칙상 요건에 부합하지 않은 휴학 신청까지 합치면 지난 8일 기준 누적 1만4081건(74.9%)에 달한다.
전공의들이 이탈한 상황에서 의대 교수들마저 사직 등 집단행동에 나서는 등 대학들은 향후 더욱 난감한 상황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서울 또 다른 사립대 관계자는 "본과 3·4학년들은 개인 의사보다 전공의들이 병원에 복귀하지 않으면 수업 듣기가 굉장히 힘들어진다"며 "이 학생들 수련을 담당하는 게 전공의들이고 이걸 교수들이 다 할 수도 없는 숫자라, 전공의 사태가 해결돼야 방향이 보일 것"이라고 토로했다.
일각에선 교육부가 당부와 경고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녹색정의당 정책위원회는 최근 "교육계 수장이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으로 의대생들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방법"이라고 제언했다. 이 장관은 이날 오후까지 의대협 비상대책위원회 공동대표 3인 등에게 대화를 제안했으나 어떤 회신도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