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시형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징계 취소 소송을 비롯해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손해배상 소송,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명예훼손 혐의 재판까지 최근 1심 판결을 뒤집는 2심 선고가 최근 잇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항소심에서 원심 판결이 파기되는 비율은 크지 않아 배경이 주목된다.
2023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2심에서 1심 판결이 파기된 이른바 '원심 파기율'은 형사의 경우 총 약 40%, 민사의 경우 약 37%에 그쳤다.
항소심 재판부가 새롭게 조사한 내용 없이 원심에서 제출된 증거만으로 1심 판단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은 지난해 2월 "2심이 1심을 뒤집으려면 1심 판단을 수긍할 수 없는 납득할 만한 사정이 나타나야 한다"고 판시했다.
◆ 추미애 '관여' 의미 넓게 해석돼 1심 패소→2심 승소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검찰총장 재직 당시 받았던 징계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1심 패소를 뒤집고 2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윤 총장은 지난 2020년 12월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했다는 등의 이유로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에게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윤 총장의 징계 사유와 절차가 적법하다고 판단했지만, 2심 재판부는 "추 전 장관의 징계 절차 관여는 적법절차 원칙에 어긋난다"며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사안을 두고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린 이유는 '관여'에 대한 의미 해석 때문이었다.
소송의 쟁점은 '징계 절차의 위법성' 여부였다. 징계를 청구한 사람은 사건 심의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검사징계법 17조 2항을 두고 2심에서는 '관여' 의미를 넓게 해석해 1심과는 정반대 판단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관여'의 사전적 의미를 언급하며 "어떤 절차에 관여한다는 것은 그저 절차 자체에 행위자로서 참가한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며 '징계 청구자'인 추 전 장관이 징계 심의기일을 지정‧변경하는 등 관여한 행위가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 기자 상대 손배소 한동훈…'명예훼손 의도' 없어 2심 패소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1일 1심과 다른 판단을 받았다. 한 위원장은 검사 시절 자신을 향해 '부실 수사' 의혹을 제기한 전직 기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지만, 2심에서 패소로 뒤집혔다.
한 위원장이 고소한 A 기자는 법조 기자로 활동하던 지난 2021년 자신의 SNS에서 '한 위원장이 검사 시절 부산 초고층 주상복합건물 엘시티(LCT) 관련 비리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이에 한 위원장은 "당시 서울에서 근무 중이라 부산지검이 진행한 엘시티 수사에 전혀 관여한 바 없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의 판단을 가른 쟁점은 A 기자에게 한 장관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1심 재판부는 A 기자가 정당한 언론활동 범위를 벗어나 허위사실을 적시했다며 A 기자의 책임을 인정했으나, 2심 재판부는 A 기자가 한 위원장에게 '외관상' 수사 권한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게시글을 쓴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엘시티 사건은 수사결과 발표 후에도 고발이 이뤄져 관련자들이 기소됐고 당시 언론과 정치권에서도 '부실 수사' 의혹 제기가 계속되고 있었다"며 "피고는 언론인으로서 원고가 수사에 추상적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충분히 의혹을 제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이 재직했던 대검찰청 반부패강력부의 관할이 전국에 걸쳐있고 한 위원장이 근무한 부산고검은 지방검찰청 지휘감독권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며 "한 위원장이 수사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건 A 기자도 인정하고 있고, 개별 사건의 처리 경과와 부서 업무분장은 내부 정보라 피고가 법조 기자로 활동했어도 구체적 확인이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 '비방 목적' 때문에 무죄→유죄 뒤집힌 최강욱
1심 무죄에서 2심 유죄로 뒤집힌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법원이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했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최 전 의원은 이른바 '채널A 사건' 관련 이동재 전 기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지난달 17일 2심 재판부는 이를 파기하고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이 재판의 쟁점은 '비방 목적' 여부였다. 1심 재판부는 최 전 의원에게 비방의 목적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봤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1심 재판부는 최 전 의원이 이 전 기자가 부당한 방법으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 비위를 제보받아 임박한 선거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검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을 비춰 이 전 기자를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면 2심은 최 전 의원은 이 전 기자를 공격하기 위해 편지를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내용을 왜곡해 올려 피해자 비방 목적이 있다고 봤다.
최 전 의원은 "똑같은 사안과 적용 법조를 두고 1심과 2심의 재판부의 판단이 극단적으로 달라진 이유가 무엇이냐"며 "표현의 자유를 여러 차례 말했는데도 재판부가 어떤 언급도 없어 대법원의 판단을 구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 가습기살균제 기업 2심서 유죄로…'새 증거'가 스모킹건
'새로운 증거' 때문에 1심 무죄에서 2심 유죄로 뒤집힌 사건도 있다. 이른바 '가습기 살균제' 가해 기업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 사건이 대표적이다.
서울고법 형사5부(서승렬·안승훈·최문수 부장판사)는 지난달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74)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65)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1심은 독성 화학물질 CMIT·MIT가 폐 질환 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무죄로 봤다. 검찰이 2심 과정에서 CMIT와 MIT를 실험 쥐에게 노출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폐와 간·심장 등에서 해당 성분이 검출됐다는 연구 결과를 새로운 증거로 제출하면서 2심 유죄를 이끌어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2심에서 새로운 사실관계가 드러나거나 증거가 추가된다면 결과가 당연히 달라질 수 있다"며 "법관이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해석했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실관계 자체도 평가의 요소가 있다"며 "더구나 평가와 해석 요건이 상대적으로 큰 사건들의 경우 일반적인 사건보다 판사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어 1‧2심 판단도 바뀔 여지가 많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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