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정채영 기자] "스무 살 청년들이 수십 년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을 백발이 성성한 지금에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고문과 폭력의 아픈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조종주 강제징집 녹화·선도 공작 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전두환 정권 시절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청년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일부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6부(황순현 부장판사)는 22일 박만규·이종명 목사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3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각각 9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결정과 증거들에 따르면 원고들이 불법 구금과 폭행·협박을 당하고 양심에 반하는 사상 전향과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사실, 그 이후에도 감시와 사찰을 받은 사실이 넉넉히 인정된다"며 "국가는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국가는 소멸시효가 지나 손해배상 청구권이 없다고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국가는 과거사정리법을 제정하면서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에 대해 피해회복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며 "그럼에도 권리를 행사하는 원고들에 대해 새삼 소멸 시효 완성을 주장하며 배상을 거부하는 건 권리 남용"이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박 목사는 "지난해 12월 진화위의 유예 결정을 받고 10개월이 좀 지났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국가에서 사과라도 하고 시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결국 법원의 판단까지 받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의 판단에 대해 "국가 불법 행위가 인정돼 환영한다. 숙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라며 "우리나라에 저 같은 피해를 입는 분들이 없도록 법원이 내린 엄중한 판결이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다만 박 목사의 소송 대리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항소 가능성을 내비쳤다. 최 변호사는 "과연 법원에서 인정한 9000만 원이 재발을 막기 위한 메시지를 던져줄 만큼인지, 피해회복을 할 수 있는 금액인지는 의문을 제기한다"며 "당사자분들과 항소 여부를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2기 진화위는 지난해 11월 프락치 사건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후 두 사람이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했다는 결정통지서를 법원에 보냈다. 이와 함께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류순권 목사는 "법원에 온 결정문에서는 특별법 제정도 권고한다고 했지만 특별법 제정이 빠진 것이 문제가 아닌가 의문을 품는다"며 "국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두 목사에) 뒤이어 수백 명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대책을 마련해주길 바라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보였다.
이 사건은 1970~1980년대 민주화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을 강제로 군대로 끌고 가 고문·협박해 전향시킨 뒤 신분을 속여 활동하는 프락치로 만든 사건이다.
박 목사는 1983년 9월 육군 보안사령부 분소가 있는 과천에서 구타, 고문을 당한 뒤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목사 역시 영장 없이 507보안대에 연행돼 조사받으며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조 사무처장에 따르면 현재 같은 이유로 소송을 시작한 이들은 114명이며 추가로 소송을 시작할 인원은 101명이다. 이들은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의 법률상 대표자인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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