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최의종 기자]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이라크 전쟁 관련 사안을 결정함에 있어서 헌법에 명시된 반전·평화·인권의 원칙을 준수해 신중히 판단할 것을 권고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노무현 정부 시절인 지난 2003년 이라크 파병을 사실상 반대하며 낸 의견이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존재감은 컸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인권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할 인권위지만 최근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논란에 휩쓸렸다.
군 사망사고 유가족 일동은 지난 5일 서울 중구 인권위를 방문해 인권위 상임위원 김용원 군인권보호관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 뒤 면담 요청이 불발되자 군인권보호관실 앞에서 1시간30분가량 직원들과 대치하다가 떠났다.
고 윤승주 일병과 고 이예람 중사 사건 등을 계기로 지난해 7월 출범한 군인권보호관(차관급)은 군 인권침해 예방과 군인 인권 보호 업무 등을 수행하고 있다. 누구보다 군 사망사고 유가족이 설치를 요구해 만들어졌으나 출범 1년 만에 사퇴 요구에 직면했다.
군 사망사고 유가족 일동이 김용원 군인권보호위원장 겸 군인권보호관 사퇴를 요구하게 된 배경은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대령) 긴급구제 신청 대응이다. 고 채 상병 사건 이첩 논란으로 군검찰에서 항명 혐의로 입건된 박 대령에 대한 긴급구제 신청이 기각됐다.
인권위 안팎에서는 이같은 인권위의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달 14일 박 대령 수사 중단 요청 등 긴급구제 안건이 들어왔으나 정족수 부족으로 회의는 무산됐다. 당시 김 위원은 건강상 이유로 병가를 쓰고 불참했다.
김 위원은 같은 달 29일 군인권보호위를 열고 긴급구제 신청을 기각했다. 당시 군인권보호위는 박 대령이 법원에 보직해임 무효확인 소송을 내고 이미 견책 징계 처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해 긴급구제를 통한 피해자 보호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봤다.
이는 인권위 상임위원과 시민단체 사이 법적 분쟁으로 번졌다. 김 위원은 '외압 의혹'을 제기한 군인권센터가 명예를 훼손했다며 센터와 임태훈 센터 소장을 상대로 각 5000만원 상당 손해배상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어렵게 군인권보호관이 만들어졌는데 권한을 알맞게 사용하고 있는지에 문제의식이 있다"라며 "차관급인 김 위원이 개인 소명을 위해 보도자료를 내는 것도 바람직 해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3개월 먼저 상임위원이 된 이충상 위원은 내부에서 진정을 당하자 보복성으로 '징계 등을 언급했다'는 논란 대상이 됐다. '윤석열차' 진정 조사가 편파적이었다며 조사관을 비판하는 댓글을 내부게시판에 올려 진정 대상이 됐는데, 피진정인 조사에서 '보복성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 연상된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이명박 정부 당시 현병철 위원장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직을 포기했는데 '퇴보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 위원장은 용산 참사를 놓고 "독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등 발언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용산 참사와 PD수첩 사건 등 사회적 관심이 쏠리는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청와대가 인권위 내 특정 인사를 축출하거나 인사 불이익을 주기 위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이후 혁신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위에는 보수·진보 측면 모두 있다.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를 제외하면 '북한 인권' 역시 인권위가 다룰 문제"라며 "하지만 정부 성향을 떠나 현재 인권위가 제대로 된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권위 권한이 강하면 정치적으로 휘말리고, 약하면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현재 권한은 최선이지만, 의견 표명에는 '사회적 신뢰'가 중요하다"며 "(박 대령 사건 등) 진지한 토론과 합의 없는 행보들은 자칫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다"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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