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에도 태풍에도 담장을 넘는다…가스검침원 '극한 노동'


한달 3900가구 검침…온열질환가이드는 사치
제각각 계량기 위치에 담장 넘다 도둑 오해도

계량기 관측을 위해 도시가스 점검검침원 최모 씨가 담을 넘어가고 있다. 바로 옆 울타리엔 철조망이 놓여 있다. /이장원 인턴기자

[더팩트ㅣ이장원 인턴기자] 태풍 '카눈'의 기세가 마침내 서울에 닿은 8월 어느날. 기록적 폭염은 한풀 꺾였지만 거센 비에 외출이 내키지 않는 날씨다.

체크무늬 우비를 걸친 한 중년 여성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뚫고 서울 중랑구의 한 주택가를 돌아다닌다. 주택 담 너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여성은 숨을 고른 뒤 훌쩍 담장을 뛰어넘었다.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허리춤에서 손바닥만 한 PDA 기계를 꺼내 무언가를 입력하고선 다시 담을 넘는다.

얼핏 의심스러워 보이는 행동이지만, 우비 안 짙은 남색 조끼엔 '도시가스'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더팩트>는 거센 태풍을 뚫고 다니는 12년차 도시가스 점검검침원 최모 씨를 만났다.

◆납기일 내 검침 필수…하루 평균 500가구

한국의 사계절은 변화무쌍하다. 여름철이면 찌는듯한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겨울이 되면 칼날 같은 추위를 느낀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한층 더 강력해진 장마와 태풍은 덤이다. 온열질환 예방가이드는 이들에겐 꿈 같은 이야기다.

정해진 검침 납기일 내 무조건 검침을 완료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의 여유도 없다.

"1년 내 1번 혹은 2번만 하면 되는 가스 안전점검은 제가 스케줄을 짜서 할 수 있는데 검침은 날짜가 정해져 있으니까 빼도 박도 못하죠. 지난번에도 납기일 내내 비가 와서 우비 쓰면서 (검침을) 했어요."

검침원 최씨는 우비를 잠시 걷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대개 4일씩 한 달에 2번 있는 검침 납기일 동안 최씨가 찾아다녀야 하는 계량기는 약 3900개다. 하루에 약 487가구를 돌아야 하는 고된 여정이다.

검침 대상 가구들이 한 지역에 다 모여있지도 않다. 주택 유형, 보일러 유무 등에 따라 검침 및 안전점검의 난이도가 달라지는 까닭에 지역이 아닌 업무 강도를 기준으로 관할 가구를 정했기 때문이다.

대개 4일씩 한 달에 2번 있는 검침 납기일 동안 최씨가 찾아다녀야 하는 계량기는 약 3900개다. 하루에 약 487가구를 돌아야 하는 고된 여정이다. /이장원 인턴기자

계량기 숫자보다 더 큰 문제는 위치다. 도시가스사업법 시행규칙상 명확한 위치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길가에서 보이는 벽면에 계량기가 설치돼 있으면 좋은데, 건물 뒤편에도 있고 집 사이에도 있고 다 제각각이에요."

특히 대문이 있는 건물은 정상적으로 검침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확대 기능을 이용해 계량기 수치를 확인한다. 이마저도 여의찮으면 담장을 뛰어넘어야 한다.

언뜻 도둑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라 최씨는 늘 "가스 검침이에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실제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밖으로 나와 최씨와 마주치는 주민들이 적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의 좁은 벽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은 채 게걸음으로 이동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더군다나 바닥엔 에어컨 실외기나 각종 자재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어 사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고객 민원 많다는 이유로…말짱 도루묵된 격월검침

도시가스 검침원들은 가스 사용량이 적은 하절기만이라도 격월 검침을 해야한다고 호소한다.

온수나 난방 사용 빈도가 낮아 지난달 혹은 전년도 같은 기간을 가스요금 책정 기준으로 삼아도 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 2020년 6월 도시가스 공급규정을 개정해 '하절기(6~9월)엔 (검침을) 격월로 실시할 수 있다'는 문구를 추가했다.

그러나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인 만큼 판단은 전적으로 도시가스 회사에 달렸다. 최씨가 근무하는 도시가스 회사의 경우 공급규정이 개정된 이듬해인 2021년 딱 한 해만 격월 검침을 했을 뿐 지난해부터 다시 매월 검침으로 돌아왔다.

"당시에 7, 9월 검침을 쉬었는데 회사가 아예 가스요금 고지서를 안 보냈어요. 7, 9월 가스 사용량을 아예 '제로(0)'로 잡아버린 거죠. 그거 때문에 가스를 공급하는 한국가스공사와 문제가 생겼어요. 가스는 팔았는데 돈이 안 들어오니까."

주민 민원도 빗발쳤다. 정확하게 가스를 사용한 만큼만 가스요금을 내고 싶은데 왜 요금을 더하거나 빼냐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검침원들의 근무 환경 개선은 후순위로 밀렸다.

도시가스 점검검침원 최모씨가 집 사이 계량기를 확인하기 위해 좁은 틈 사이를 지나가고 있다./이장원 인턴기자

검침과 점검 업무를 분리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최씨는 "검침과 점검은 같이 하는 게 좋다. 그래야 계량기 수치가 낮게 나왔을 때 이게 단순 고장인지 아니면 집주인에게 문제가 생긴 건지 등을 파악하기 용이하다"고 말했다.

도시가스 점검검침원들이 격월 검침과 업무량 감축을 계속 요구하는 건 단순히 힘들어서만은 아니다.

"업무량을 줄이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게 고객들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방향이니까요."


bastianle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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