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세정 기자·이장원 인턴기자]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승진을 목전에 둔 테드는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겠다며 아내 조애나는 집을 떠났다. 가정에 소홀했던 테드가 일곱살 아들 빌리를 홀로 돌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일과 살림, 아이 뒷바라지까지 난관의 연속이지만 테드는 나름의 성장통을 겪으며 적응한다.
서투른 솜씨로 아내의 빈자리를 메꿔가던 테드에게 어느 날 조애나는 빌리를 데려오겠다며 양육권 소송을 건다. 테드는 법정싸움을 이어간다. 그러나 상황이 조애나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결국 양육권을 뺏긴다. 명배우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의 내용이다.
44년 전 영화는 경력 단절 여성이 겪는 고충을 조명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서사는 부성애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아빠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보다 조금은 부족한 것으로 인식된다. 냉정히 부성애와 모성의 크기를 저울질하던 영화 속 법정도 끝내 모성애의 손을 들어준다. 통념처럼 엄마의 사랑은 아빠의 사랑보다 필수 불가결한 존재일까. 미국인 존 빈센트 시치(John Vincent Sichi·52)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7월 서울 양재동. 점심시간이 되자 직장인들이 더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직장인 무리는 생경한 풍경에 하나둘씩 발걸음을 멈췄다. 길 한복판에서 러닝머신을 타는 미국인 존 시치 때문이다. '어떻게 한국에 왔나요' '이 날씨에 왜 러닝머신을 타나요' 시치를 향해 수십 가지 궁금증이 떠오른다.
시치의 고향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치는 부족할 것 없던 미국 생활을 제쳐두고 2020년 8월 무작정 한국을 찾았다. 아들(6)과 딸(4)을 만나기 위해서다. 시치는 2013년 한국인 여성 A씨와 결혼해 두 자녀를 얻었다. 그러나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2019년 11월 A씨는 자녀들을 데리고 돌연 미국을 떠났다. 이후 A씨가 돌아오는 것을 거절하면서 아이들과의 관계도 단절됐다.
법의 힘을 빌려야 했다. 시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양육권 소송을 제기했고 승소했다. 이후 한국 법원도 양육권은 시치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판결도 소용이 없었다. A씨를 상대로 아동반환 강제집행을 시도했지만 엄마와 있고 싶다는 아이들의 의견 때문에 실패했다. 아이들을 만나러 어린이집에 찾아갔지만 양육권자인 시치가 되레 경찰에 신고당하기도 했다.
러닝머신은 이같은 상황에서 시치가 택한 '시위'다. 러닝머신을 들고 시치는 서울 이곳저곳을 누빈다. 이날은 서울가정법원 인근 양재동 사거리를 택했다. 옆에는 자녀들의 사진 패널과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라는 서툰 글씨가 적힌 보드가 세워져 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에도 시치는 러닝머신에 올랐다. 티셔츠는 금세 흠뻑 젖었다. 왜 러닝머신 시위를 택했냐고 묻자 시치는 아이들 사진을 손으로 가리킨다. 그는 "아이들은 저기 있지만, 저는 러닝머신처럼 제자리에 늘 있다. 다가가려 해도 간극이 여전히 있는 상황을 표현한다. 경찰서도 가고, 법원도 가고, 언론에도 나오지만 러닝머신처럼 저는 늘 제자리에 머문다"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겠다는 의미도 있다"고 했다.
시치는 "지금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제가 아이들의 아버지고,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양육권을 갖고 있다. 경찰은 아이들이 어딨는지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미국에서 한국 법무부에 '아이들이 어딨는지 경찰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도 대답이 없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 법원에서 승소했을 때 순순히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시치는 "제 미국 변호사가 '헤이그협약에 따라 한국 법원에서 승소하면 길어도 두 달 안엔 아이들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인데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고 말했다.
헤이그 국제 아동 탈취협약은 국적이 다른 부부 사이에서 양육권 분쟁이 생겼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부모 한쪽이 해외로 아동을 무단으로 데려갈 경우 아동을 신속히 원래 자리로 데려올 수 있도록 하는데 한국은 지난 2012년 12월 협약에 가입해 이듬해 3월 협약 이행을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관련법에 따라 아동을 반환하라는 법원의 이행명령을 받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1천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과태료 명령에도 30일 이내 이행하지 않는다면 감치를 명할 수 있다.
한국은 2년 연속 미국 국무부의 헤이그협약 불이행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 법원의 아동반환심판 사건 처리가 길고, 유아인도 강제집행이 불가능한 점이 근거였다. 대법원 재판예규에 따라 의사능력이 있는 유아가 인도를 거부하는 때에는 집행할 수 없다.
시치의 법률대리인 민지원 변호사는 "4~5세 아이에게 '엄마랑 살고 싶어, 아빠랑 살고 싶어'라고 묻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는 것이 맞다는 법원 판단에도 아이가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면 집행관이 포기를 해버린다"며 "감치 명령이 내려져도 경찰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 6개월이 지나면 감치 집행 효력도 사라진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법무부는 "아동을 부모 일방으로부터 강제 분리해 인도하는 집행은 아동 복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양육권 분쟁 상황에 책임이 없는 독립된 인격체인 아동 의사를 어느 정도로 고려할지에 대한 종합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해명했다. 다만 협약상 중앙당국인 미국 국무부와 대화 채널을 개설해 협조 관계를 구축하고, 재판예규 개정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시치의 러닝머신은 언제 멈출 수 있을까. 시치는 "제 시위는 아이들의 엄마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정부를 향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운 좋게도 좋은 기업들에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여유로웠지만 몇 년이 지나니 힘겹다. 부담이 된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지만 시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달린다. 아들과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물음에 시치는 "아빠가 너무 사랑해. 보고 싶어요." 한국말로 또박또박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