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이 최근 200회를 넘겼다. 2018년 11월 기소 이후 햇수로 5년째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전 대법원장과 대법원 간부 등이 기소된 사안의 중대성도 있지만, 유구한 재판 진행도 사법부 역사에 발자취를 남길 만하다. 4년 4개월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는 의혹 폭로자와의 피할 수 없는 대면도, 자신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원고와의 껄끄러운 만남도 있었다. 자신의 재판을 진행하는 재판부·검찰과 거세게 충돌하기도 했다.
◆창과 방패의 피할 수 없는 만남…임종헌의 증인들
임 전 차장의 증인은 대부분 전·현직 법관이었다. 피고인으로서 선후배 또는 동료를 증인으로 만나는 건 껄끄러운 일이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처음으로 폭로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특히 그랬다. 2020년 12월 15일, 평소보다 많은 취재진과 방청객이 모인 법정에서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임 전 차장은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해체하기 위해 중복가입 해소와 가입한 판사들에 인사 불이익을 도모하고, 일부는 실행에 옮긴 것으로 조사됐다. 이 과정에서 대법원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에게 대응 방안을 모색해 보고서로 작성하라는 등 부당한 지시를 한 혐의도 받는다. 이 의원은 이 시기 대법원 법원행정처 제2기획심의관으로 부임했고, 이같은 내막을 알게된 뒤 법관직을 내려놓았다. 이 의원의 행보는 언론보도로 이어지고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의원은 심의관으로서 자질을 갖춰 법원행정처로 발령했을 뿐, 부수적 목적은 없었다는 임 전 차장 측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임 전 차장은 담담했지만 이 의원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증인신문을 마친 뒤 재판부로부터 마지막 발언 기회를 얻은 이 의원은 "법원은 국민의 것이고 판사들은 법원을 빌려 쓰는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판사의 윤리 수준이 무엇인지 생각했으면 좋겠다"라며 울먹였다.
자신에게 3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원고'와도 맞닥뜨렸다. 2021년 10월 5일 증인으로 나온 송승용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했다가 '물의야기 법관'으로 지목됐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송 부장판사는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됐고 격오지로 발령됐다. 문제가 된 글은 당시 대법관 후보를 비판한 글이다. 입법·행정부와 달리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사법부 최고 법원에서 각 조직의 요직 출신을 대법관으로 임명하는 관행을 없애야 한다는 취지였다. 당시 대법관 후보들은 각각 검사장과 법원행정처 차장 출신이었다.
임 전 차장 측은 물의야기 법관 문건이 생산된 6년 전으로 돌아간 듯 '왜 그런 글을 자주 썼느냐'고 추궁했다. 송 부장판사는 "법원은 선출되지 않는 권력으로 소수자·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사명을 갖는다. (인적 구성) 다양화 원칙이 최고법원에서 구현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답했다.
◆'법적 조치' 엄포까지…재판장·검사와의 충돌
임 전 차장은 재판 초·중기에 자신을 기소하고 죄를 판단할 검사·재판장과도 자주 충돌했다. 2019년 3월 19일 공판에서는 임 전 차장이 법원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집행 혐의를 반박하던 중 한 검사가 웃자 "웃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부는 '지적은 재판부가 할 일'이라며 제지했다.
이듬해 6월 재판에서는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임 전 차장의 변호인들이 사임계는 내지 않은 채 갑자기 재판에 나오지 않자 당시 공소 유지를 전담하던 단성한 부장검사는 8일 재판에서 "재판부나 저희를 기망하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에 임 전 차장은 발끈했고 다음 날 재판에서 "단 부장검사가 객관적 근거 없이 공개 법정에서 피고인이 기망 행위를 했다는 발언을 해 피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 지난 기일 녹음파일이 완성되는 대로 단 부장검사에 대한 가능한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실제 법적 조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전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에 대해서도 두 차례 기피신청을 하는 등 갈등을 거듭했다. 임 전 차장은 2019년 6월 2일 추가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피고인을 범죄자로 처단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며 첫 기피 신청을 냈다. 임 전 차장 측은 즉시항고·재항고를 거듭했지만 2020년 1월 대법원이 최종 기각하면서 윤 부장판사와 재회하게 됐다. 재회한 첫날 윤 부장판사와 임 전 차장은 건강에 대한 안부를 주고받으며 재판은 다시 순항 고도에 오르나 싶었지만 1년여 뒤 다시 멈췄다.
이번에는 윤 부장판사가 과거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연루자를 단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배경이 됐다. 첫 기피 때와 달리 서울고법에서 기각 결정이 파기돼 귀추가 주목됐지만 지난해 2월 법관 정기 인사에서 기존 재판부 전원이 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현재는 김현순·조승우·방윤섭 부장판사가 대등재판부 형태로 사건을 심리하고 있고,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임 전 차장의 재판은 느리지만 치열하게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재판마다 행정권의 일환과 남용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가장 최근인 2일 재판에서는 강제 동원 배상 재판 개입 의혹에 관한 심리가 이뤄졌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대법원은 법관 해외 공관 파견 확대 등 숙원 사업을 위해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당시 청와대는 박 전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정권 당시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하는 대법원판결을 막아야 했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면 '소문'이 나니 "외교적 차원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판결이 확정되면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외교부를 통해 제출하도록 묘안을 꾸렸다는 것이 공소사실이다.
증인으로 나온 당시 외교부 2차관은 "사법부든 입법부든 국가 사이 파장을 초래하고 책임을 야기하는 사건이라면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하기 위해 국가 전체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이 사건도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불거진 사건이라 저는 이해한다"며 "이 문제를 다루실 때 이런 전반전 맥락을 살펴주십사 하는 게 증인으로서 드릴 말씀"이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임 전 차장의 204번째 공판은 15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ilraoh@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