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된다. 피해자들이 '원점이 되는 상태'를 응원한다".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제목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실에서는 피해자들이 '원점'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드라마'와 현실은 얼마나 부합할까. <더팩트>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문동은'들의 상처를 4회에 걸쳐 들여다본다.<편집자 주>
[더팩트ㅣ주현웅 기자] 학교폭력의 고통은 성인이 돼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그럴수록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트라우마는 혼자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따뜻한 관심을 구해야 한다.
<더팩트>는 학폭 피해자인 배우 성규동(27) 씨와 웃음치료사 진진연(52) 씨가 만난 자리에 같이 했다. 영상제작업체 '무엇이든 표현하는 남자'(무표남)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를 바라보고 학폭 피해의 고백과 치유 과정을 관찰했다.
규동 씨는 학생 때부터 10년 넘게 연극과 뮤지컬 및 영화 등에서 배우로 활동해 왔다.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등 씩씩한 모습만 보여 왔지만 사실 그에게는 떨치기 힘든 학폭 트라우마가 있다.
아픈 기억을 꺼낸 그는 배우라고 믿기 힘들 만큼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중학생 때 말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친구에게 불려가 구타를 당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소위 '만만한 아이'로 낙인찍힌 그는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에게 옷과 신발 등을 빼앗기기도 했다.
계속되는 학폭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부모에게 어렵게 피해를 호소했지만 '너 혼자 맞고 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과정에서 규동 씨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가해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다시 구타를 당하는 악순환에 빠졌다.
결국 학폭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하지만 간혹 피해 악몽이 떠오르면 잠을 못 이룰 만큼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했다.
규동 씨는 "사실 요즘은 낯선 사람들이 조금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며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너 왜 이렇게 얌전해졌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원래의 저는 사실 밝은 아이였다"고 했다.
가해자만큼 미운 건 바로 이 사회다. 소년범 재판을 참관한 적 있는 규동 씨는 부모나 교사가 '착실한 친구다. 그럴 아이가 아니다'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모습에 무척 실망했다. 사법 절차까지 왔을 정도면 분명한 가해자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세상이 가혹하게 느껴졌다.
규동 씨가 가까스로 아픈 기억을 꺼내 얘기하는 동안 진 씨는 시종 미소를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규동 씨와 함께 아픈 표정을 보였고 가해자를 나무라며 규동 씨를 위로해줬다.
알고보니 진 씨도 학폭 피해자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학폭을 겪고 성인이 돼서도 아픔을 간직해왔다고 고백했다. 심지어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고통스러웠다고 했다.
진 씨는 규동 씨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강조했다. 세상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고 본인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역사회 곳곳에 있는 상담 기관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역할이다. ‘왜 맞고만 있냐’는 말 대신 ‘많이 힘들었지’처럼 따뜻한 한마디가 피해자에겐 간절하다. 조언 대신 안아주고 경청하기를 지겨울 만큼 끊임없이 반복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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