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자 마자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 아기들이 있다. 그 생명의 첫 공간은 베이비박스다. 영아 유기를 조장한다는 비판과 함께 더 큰 불행을 막기위한 차선책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논쟁은 불가피하게 부모가 키울 수 없는 아기를 국가가 어떻게 책임지느냐로 향한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엄마와 아이들을 지키는 일은 우리 사회의 몫이다. <더팩트>는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엄마들과 아기의 안타까운 현실을 상.하편으로 나눠 싣는다.<편집자주>
[더팩트ㅣ김이현·조소현 인턴 기자] 끝없는 고난에 부닥쳐 양육을 포기한 부모들은 서울 신림동 한 가파른 언덕을 찾는다. 담벼락 한쪽엔 아기를 누일 만한 '베이비박스'가 있다. 박스를 열면 온기와 함께 노랫소리(엘리제를 위하여)가 나온다. 10초가 채 지나지 않아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 상담사도 후다닥 뛰어나온다.
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아기를 두고가는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아기는커녕 본인도 건사하지 못할 정도 아프거나, 가난에 시달리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다. 미혼모에 대한 사회의 시선마저 싸늘하다. 결국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는 엄마들의 마지막 선택지인 셈이다.
주사랑공동체교회가 13년째 운영하는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기만 2023명이다. 매년 150~180명의 신생아가 유기되고 동시에 구조된다. 양승원 주사랑공동체 사무국장은 "유기를 하기 위해 임신하는 엄마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양 국장은 "성폭행,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경우도 있고 화장실, 모텔 등에서 몰래 출산한 뒤 아기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가 맡기고 가는 사례도 많다"며 "미혼모들이 출산 우울증에 빠진 상황에서 여기로 오는데 아기도 살리고 산모를 살리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베이비박스가 열리면 상담사가 달려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육사가 아기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상담사는 돌아서는 부모를 붙잡아 설득을 거듭한다. 보호센터 내에는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상담이 가능한 '베이비룸'이 설치돼 있다.
양 국장은 "저희가 '10개월 동안 아기를 안전하게 품어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첫 마디를 전하면, 엄마들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린다"며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던 엄마들은 아기를 1년만 맡아주시면 어려운 환경을 좀 가다듬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들 한다"고 설명했다.
2023명 중 원가정으로 돌아간 아기는 256명이다. 17%(148명)는 다른 가정에 입양됐다. 올해엔 81명이 베이비박스에 맡겨졌고, 20명의 아기가 다시 친부모 곁에 안겼다. 양 국장은 "부모가 아기를 잠시 위탁했다가 다시 데려간다고 찾아오는 게 가장 좋은 사례"라고 말했다.
나머지 아기들은 보육원 등 시설로 보낸다. 베이비박스는 법적으로 공인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입양전문기관에 아기들을 보낼 순 없다. 더구나 아기들은 친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미등록 아기'들이다. 교회가 미아 신고를 하면 경찰이 유전자 검사를 하고, 구청에서 아기를 데려간 후 시설에 보낸다.
법을 떠나 우선 생명은 살려놓고 보자는 게 베이비박스의 취지지만, 영아유기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출생신고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미혼모들의 마지막 선택지면서도 결국 맡겨진 아기들 역시 법적·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입양마저 힘들다는 비판도 있다.
양 국장은 "사실 베이비박스를 없애는 게 궁극적 목표다. 독일 같은 경우 100개 정도의 베이비박스가 있다. 미국에선 베이비박스를 계속 만들지만 소방, 경찰, 병원이 이미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에는 그런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왜 여성들에게, 엄마들에게 더 큰 2차적 가해를 하고 그 짐을 자꾸 더 무겁게 하는지 묻고 싶다"며 "아기 낳으면 도망가는 아빠 등 남성들에 대한 책임과 처벌을 강화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법부의 유의미한 판단을 언급했다. 지난 7월 서울중앙지법 형사14단독 김창모 부장판사는 자신의 아이를 편지와 함께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엄마의 행동을 영아유기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도 해당 판결에 항소를 포기하면서 무죄가 확정됐다.
양 국장은 "박스 안이 따뜻하고, 보호하는 사람도 매시간 상주하니 유기죄가 성립이 안 된다고 본 거다. 이제 완전히 바뀌고 있는 것"이라며 "베이비박스는 최후의 수단이지 절대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최선이라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