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김세정 기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서 넉 달 새 검사 5명이 연이어 사의를 표명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고위공직자 비리 척결이라는 국민적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인력 부족 등 근본적 문제를 국회가 나서서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수처 수사1부 소속 이승규 검사와 김일로 검사는 최근 사의를 표명했다. 이 검사와 김 검사는 변호사 출신으로 공수처 출범부터 함께한 원년 멤버다. 지휘부의 만류로 사직을 고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6월 문형석 검사를 시작으로 김승현 검사, 최석규 부장검사 등 넉 달 사이 5명이 공수처에 사의를 표명했다. 문 검사와 김 검사의 사직은 수리됐으며, 최 부장의 경우 사의를 보류했다가 최종적으로 공수처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공수처 검사 정원은 처장과 차장을 포함해 25명인데 출범 이후 단 한 번도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이승규 검사와 김일로 검사까지 떠난다면 인원은 18명으로 줄어들게 된다. 수사관도 여러 명 사직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추가 이탈 가능성도 제기된다.
'설상가상' 상황인 부족한 검사 인원은 공수처의 큰 핸디캡이다. 검사 18명이면 검찰로 치면 의정부지검 남양주지청 규모다. 난이도 높은 고위공직자 범죄를 수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나마 수사 경험이 있는 검찰 출신 검사는 5명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공수처 위기의 근본적 원인으로 검사들의 비전 부족을 꼽는다. 공수처법상 공수처 검사는 임기가 3년으로 최대 3회 연임할 수 있다. 3회 연임을 해도 근무연수가 12년이라서 변호사나 검사를 관두고 갈 정도로 매력적인 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공수처가 굵직한 수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기도 했다. '1호 사건'으로 기소권이 없는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해직교사 특혜 채용 의혹을 선택해 공수처 출범을 지지한 이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난해 '고발사주' 사건에 올인했으나 상처를 크게 입었다. 손준성 검사 구속에 두 차례나 실패했고, 윗선 의혹은 밝혀내지 못한 채 손 검사만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지난 대선 기간 윤석열 당시 후보자에 대한 수사에 집중했지만, 선거 이후 잇달아 무혐의 처분을 내리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윤 대통령에 대한 수사로 현 정권과 여당엔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반대로 산파 역할을 한 야당엔 '무능력'으로 낙인찍혔다.
여론전에서 실패한 것도 한몫했다.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통신자료 조회 논란으로 한차례 고초를 겪은데다가 언론에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공수처는 타부처에 비해 대변인실 규모도 작아 제한된 인원으로 언론대응과 홍보 등을 담당하고 있어 업무량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업무 부담에 따른 악순환이 반복되는 셈이다.
◆ "뭘 잘했다고 도와주나" 야당 볼멘소리도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검사들이 떠나는 이유를 놓고 "공수처가 비전이 없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싶다"라고 답했다. 그는 "공수처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규모와 인력을 늘려야 하는 것엔 동의한다. 그러나 공수처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야 바깥에서도 지원해주지 않겠는가. 지금 가진 조직으로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데 '여기에 사람이나 돈을 더 투자한다고 해서 공수처가 과연 잘할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품을 수밖에 없게 공수처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수처 사정에 밝은 A 변호사는 리더십 부재를 이탈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공수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고위공직자를 수사한다는 명예와 신념을 갖고 일해야 하는 곳이다. 검사들도 공수처에 그런 기대로 들어갔는데 과연 신념을 갖고 일을 할 수 있도록 수사가 진행됐는지 공수처 구성원들도 회의감이 든 것으로 안다"며 "설립 목적에 부합하는, 제대로 된 수사를 했다면 국회에서도 임기 보장, 인력 충원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 "일할 상황부터 만들어줘야"…국회 보완 입법 절실
입법 지원에 손 놓은 국회가 아쉽다는 지적도 많다. 오병두 홍익대 법과대학 교수(참여연대 형사사법개혁사업단 단장)는 "공수처 검사들도 열심히 해보려고 갔는데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돼야 제대로 일하지 않겠나. 애초 만들 때 '무소불위의 기관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조직과 규모가 한정돼 운신의 폭이 줄었다"며 "입법적 보완을 빨리해준다면 상황이 좋아질 것으로 본다. 뭐라도 제대로 일하게 만들어주고 난 다음에 평가도 해야 맞는 것 같다. 여건이 되지 않는데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는 이르다"고 설명했다.
검찰을 견제한다는 공수처의 존재만으로 큰 역할이 있다고도 평가했다. 특히 '스폰서 검사' 김형준 전 부장검사 사건 등 의미있는 수사도 있었는데 '과'만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도 지적했다. 오 교수는 "검찰은 중계식으로 수사를 하지 않나. 법조 기사를 보면 수사기밀이 확 드러나 있다. 그래도 공수처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며 "공수처가 수사한 사건 자체가 워낙에 복잡하다. 실제 예전에 검찰이 비슷한 사건을 수사했을 때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검찰도 그런 사건은 오랜 시간을 들여 수사를 한다. 조금 더 공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공수처는 검찰이 의식하는 기관이고, 범죄를 저지른 검사를 처벌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관이라는 상징성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오 교수는 "부패 수사를 위해 필요한 정보력을 해결할지, 경찰과 수사 협업을 어떻게 할지, 법률뿐 아니라 행정 입법 차원에서도 보완하고 차근차근 갖춰 나갈 필요 있다"며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고 '알아서 해봐, 성과 보여라'라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고 강조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공수처 검사 정원 25명은 검찰로 따지면 지방의 지청 수준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일반 직원도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검찰청도 검사는 정원으로 제한해도 수사관은 법으로 묶어놓지 않는다. 공수처만 이렇게 제한을 둔 상태에서 방치되고 있다"며 "국회에서 이후 입법으로 후속 지원을 계속해줬어야 하는 데 정치적 이슈로 힘이 빠졌다. 공수처 이후 검찰개혁 방향이 수사권 조정으로 옮겨지면서 정치인들도 관심이 사라졌다. 자리를 잡으려면 입법으로 계속 도와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