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를 뒤집은 보수…'로 대 웨이드 판결' 4대 아이러니


승소한 '로'는 반낙태주의자 변신…한국 헌재에선 낙태죄 합헌 근거로

낙태 권리 지지 시위대가 24일(현지시간) 워싱턴 대법원 앞에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은 대법원의 판결에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낙태 비범죄화의 역사적 계기였던 미국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49년 만에 연방대법원에서 뒤집히면서 입법 공백 상태인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고있다. '로 대 웨이드'는 임신부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한 상징적 판결이지만 역사적 아이러니도 품고있다. 애초 보수성향 대법원장이 자신을 임명한 보수 대통령에 반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수십년 뒤에는 결국 보수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정작 재판을 청구한 원고는 극단적인 낙태 반대론자로 변신했고, 한국 헌법재판소에서는 거꾸로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합헌의 근거로 쓰이기도 했다.

◆'확고한 보수주의' 대법원에서 나온 판결

미국 연방 대법원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낙태를 합법화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최종 결정은 각 주 정부 및 의회 몫으로 넘어갔다. 주별로 낙태를 범죄화할 길이 열린 것이다. 연방 대법원에서 보수 대법관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50년 가까이 유지된 판례가 뒤집혔다. 미국 연방 대법원은 모두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가운데 6명의 대법관이 보수 성향으로 평가된다. 낙태 문제는 미국 보수-진보 진영의 해묵은 논쟁거리였지만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문화전쟁' 이슈로 극대화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모순적이게도 로 대 웨이드 판결 당시 대법원장은 '보수주의자' 워렌 버거였다. 진보적 대법원에 지친 보수 인사들의 지지 속에서 닉슨 대통령은 '확고한 보수주의자'를 물색한 끝에 버거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닉슨 대통령은 버거가 대법원 분위기를 '좌'에서 '우'로 바꿔주기를 기대했으나 허사가 됐다. 버거 대법원장 시절에도 흑인과 백인 학생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일부 학생들을 통합 스쿨버스에 태우도록 한 조치를 허용하는 등 진보적인 판결이 적지 않게 나왔다. 닉슨 대통령이 사퇴한 계기가 된 '워터게이트 사건'도 버거 대법원이 선고한 판결이다.

버거 대법원의 대표적 판결로 꼽히는 사건이 바로 '로 대 웨이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원고 '제인 로'는 당시 텍사스주 댈러스카운티의 지방검사장 헨리 웨이드를 상대로 임신 중단을 금지한 텍사스주법의 합헌성을 묻는 소송을 제기했다. 버거 대법원은 1973년 대법관 7대 2 의견으로 낙태를 범죄화한 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태아가 모체 밖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인 출산 3개월 전까지는 임산부가 임신 상태에서 벗어날 결정을 내릴 권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미국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인정한 역사적인 판례로 여겨진다.

◆한국에서는 '반 낙태' 근거로 쓰인 로 대 웨이드

버거 대법원장만큼이나 '로', 본명은 노마 매코비인 원고는 모순된 삶을 살았다. 매코비는 1990년대에 들어서 변호사에게 속아 낙태할 권리를 얻어내려는 '미끼'로 이용됐다고 주장했다. 이후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가 돼 누구보다 급진적인 낙태 반대론자가 됐다. 매코비는 한 기자회견에서 성범죄로 임신이 되더라도 낙태는 안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각종 낙태 반대 집회에서 과격한 행동을 해 공적인 장소에서 발언을 금지당하는 법원 처분을 받기도 했다. 매코비는 2017년 2월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매코비의 변신은 한국 사법부에도 영향을 줬다. 낙태 비범죄화의 상징이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이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낙태죄 처벌조항을 유지해야 한다는 합헌 의견의 근거로 쓰인 이유다. 합헌 의견을 낸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보는 바와 같이 (낙태죄 비범죄화에 대한) 미국 내에서의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건의 당사자였던 매코비라는 여성은 나중에 낙태 반대 운동가로 변신해 활동했다. 아직도 많은 주에서 낙태에 대한 규제와 이를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는 인간의 존엄을 위협할 수 있는 현실을 입법을 통해 개선해 나갈 의무가 있다. 낙태를 처벌하는 규정 이외에 낙태를 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제도를 규범화하는 입법정책도 필요하다"라고 촉구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2019년 4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유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회원들과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정문 앞에서 동시에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남윤호 기자

◆입법 공백에 '비범죄화' 어부지리로 따라왔지만

헌재에서 개정 시한으로 제시한 2020년 연말이 훨씬 지났지만 법무부의 안을 비롯한 각종 개정안들은 국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선 입법이 지연되면서 낙태는 합법도 불법도 아니게 됐다. 처벌조항의 효력이 사라지면서 무죄 판결은 속속 내려진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달 업무상촉탁낙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의사 2명의 재심에서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2020년 4월에도 낙태 시술을 한 의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같은 해 7월 대전지법에서는 시술받은 여성과 의사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되기도 했다. 광주지법은 지난해 5월 임신 3주 태아를 낙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조산사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면서 "조산사의 낙태 시술은 여전히 형법상 금지된 행위지만 헌재에서 낙태죄에 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사정을 유리한 요소로 고려했다"라고 밝혔다.

처벌조항이 효력을 잃어 사법적으로는 어부지리로 비범죄화가 된 모양새다. 하지만 최전선에 있는 여성과 의료진의 혼란은 크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한보연)에서 지난해 11월 19일~12월 6일 만 15~49세 여성 850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임신을 경험한 사람의 17.2%가 인공임신중절을 해 '위기임신 상황'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낙태 관련 정보에 대한 주된 습득 경로는 인터넷 게시물 또는 온라인을 통한 불특정 대상이 46.9%에 달했다. 낙태 이후 7.1%가 신체적 증상(자궁천공, 자궁 유착증 등)을 경험했으나 절반만 치료를 받았고 경험자의 55.8%가 정신적 증상(죄책감, 우울증 등)을 경험했으나 치료를 받은 비율은 16.9%에 그쳤다.

한보연은 "위기임신 상황에 높인 여성이 다수인데도 관련 법제도와 가이드라인이 부재해 의료현장의 여성과 의사가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공임신중절을 하게 되거나, 여성은 인공임신중절 과정에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경험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며 "위기상황을 예방하거나 위기상황에 있는 여성을 지원하고, 안전한 인공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대체입법이 신속히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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