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정용석 기자] 한 여고생이 군인에게 편지 한 통을 썼다. 학교는 대가로 봉사활동 2시간을 줬다.
군인은 편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온라인상에 유포했다.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그 여고 학생들을 상대로 디지털 성범죄를 저지르는 등 보복에 나섰다.
여고 학생들의 피해 사례가 이어지자 20~30대 여성 7명이 모였다. 이들은 지난 17일부터 위문편지 문화를 비판하는 현수막을 서울 곳곳에 걸며 피해자 학생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이 SNS에서 결성된 ‘편지찢는여자들’이다.
◆"위문편지 완전철폐"...7명 개인 모여 현수막 프로젝트
"여전히 10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미흡하고, 학교 측은 아직도 사과하지 않고 있다. 피해 학생들에게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고 싶었다."
‘여고 위문편지 논란’ 이후 현수막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편지찢는여자들’ 팀의 공동대표 라텔(활동명)의 말이다.
편지찢는여자들은 서울 모 여고 학생들이 당한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모임이다. 공동대표 라텔, 권태랑(반성폭력운동가), 팀원 태평해, 해일, 쓰담, 디자이너 주타, 한영 등 7명의 구성원들은 후원금 모집부터 현수막 시안 제작과 홍보 등을 전부 도맡아 한다.
라텔은 "여전히 10대 여성들이 위문편지를 쓰는 문화가 남아있다는 점에 분노했다"며 "걸그룹이 군부대에 가서 위문공연을 하는 등 특히 젊은 여성들이 누군가의 요구로 위문활동을 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위문편지 철폐를 요구한다. 피해가 발생한 여고 앞을 비롯해 강남역, 서울시청, 국회, 청와대 등 15곳에 16개의 현수막을 게시했다.
현수막에는 "일제잔재 위문편지", "군인 위로는 여성들의 몫이 아니다", "위문편지 완전철폐", "학교는 학생에게 사과하라" 등의 문구가 담겼다.
이 여고는 모 군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이유로 매년 학생들에게 위문편지를 쓰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은 편지쓰기가 사실상 강제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여고에 다니는 한 학생은 "그간 위문편지 활동에 반발이 심했는데, 학교 측은 작성 가이드까지 제시하며 활동을 강제했다"고 밝혔다.
억지로 쓴 편지는 디지털 성폭력으로 돌아왔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은 학생들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스토킹, 성희롱, 딥페이크 합성물을 제작해 퍼트린 것으로 알려졌다.
공격은 오프라인에서도 이어졌다. 목동의 대형학원 원장 A씨는 자신의 SNS에 "앞으로 그 여고 학생들은 가르치지 않겠다"고 썼다. 학원에 다니고 있는 그 여고 소속 학생들은 내보내겠다고도 했다.
'편지찢는여자들'의 활동 역시 순탄치만은 않다. 16개의 현수막은 건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대부분 철거됐다.
이들이 SNS에서 접수한 제보에 따르면 현수막은 민원에 따라 구청이 수거하기도 했지만 임의로 떼어간 사례들도 적지 않다.
현수막 제작을 맡긴 업체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A업체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현수막 시안 내용을 올리고 ‘쿵쾅’ 등 여성혐오 표현을 쓰며 조롱했다. 환불을 요구했지만 업체는 거부한 상태다.
이는 여성주의 운동에 대한 백래시(반발)라고 라펠은 우려한다. 그는 "여성 인권 관련 현수막은 대체로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목소리를 막으려 여성에게 백래시를 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백래시에도 위문편지 폐지 운동은 확산되고 있다. 지난 12일 게시된 ‘여자고등학교에서 강요하는 위문편지 금지해주세요’라는 이름의 청와대 국민청원은 2주 만에 15만 명 가까운 동의를 었었다.
편지찢는여자들은 이번 현수막 프로젝트의 후속 활동을 준비 중이다. 2차 현수막 부착, 대선 후보를 향한 질의서, 오프라인 집회 등을 통해 위문편지 활동의 부당함을 알릴 계획이다.
"10대 여성들은 사회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약자들입니다. 지금 어른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피해 학생들이 회복하고 위문편지가 철폐되는 그 날까지 방관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