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주현웅 기자] "공부해야 하는데 울화통 터져서 잠도 안 와요."
지난해 9월 치러진 2차 세무사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30대 이모 씨의 말이다. 그는 본인 성적표를 직접 보여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세법학1부’ 한 과목 과락(100점 만점의 40점 미만)만 면했다면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법학1부는 10년 이상 국세 업무를 한 공무원 등은 면제받는 과목이다. 여기서 과락한 수험생이 전체 응시자의 82.1%(3254명)이다. 공무원 특혜 의혹의 배경이다. 이번 시험에서 공무원 합격률은 지난 5년 평균(2.53%)의 약 10배인 21.39%였다.
일각에선 ‘전문자격시험 공무원 특혜’ 제도 재검토를 주장한다. 세무사를 비롯한 회계사·변리사·관세사 등 시험에서 공무원에 혜택을 주는 게 바람직하냐를 놓고서다. 제도의 도입 취지도 물론 있으나, 현재의 국민 눈높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세무사시험 나비효과…"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아야"
17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세무사시험 공무원 특혜 의혹을 제기한 ‘세무사시험개선연대’(세시연)의 문제의식 중 한 가지는 "공무원이 일부 과목 면제 특혜를 누리는 게 공정하냐"는 것이다.
세무사뿐 아니라 관세사와 변리사 등 전문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분위기가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도 자신들 분야에서 공무원 특혜로 비친 사례를 접한 적 있어서다.
2014년 관세청의 모 공무원은 금품수수가 적발돼 중징계 정직 처분을 받았음에도 1차 시험을 면제받고 관세사로 등록해 논란이 일었다. 2018년 대한변리사회는 특허청이 도입하려던 변리사 2차 시험의 '실무 전형'이 경력 공무원 특혜라며 청와대 등에서 집회를 벌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방침은 폐기됐다.
황연하 세시연 대표는 "근무경력을 채웠다는 이유로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명백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며 "당장 대선후보들부터 이번 사태의 경위를 밝히려는 의지와 공무원 특혜 개선 필요성 등에 입장을 분명히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강조했다.
◆ 헌법소원에 법안 발의도…논란 반복 언제까지
현재 공무원의 일부 과목 면제 등 특혜가 존재하는 전문자격 시험은 10개 이상이다. 각각 △공인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법무사 △공인노무사 △관세사 △보세사(보세화물 관리자) △소방시설관리사 △행정사 △경비지도사 등이다.
이 제도의 불공정성을 들어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는 이어져 왔다. 2000년 관세사와 법무사 시험, 2007년 세무사와 변리사 시험의 공무원 일부 시험 면제를 놓고는 일반 응시자의 직업선택 자유 및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이 청구됐다. 헌재는 입법 취지에 비춰 ‘명백히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라며 전부 기각 혹은 각하했다.
국회에서도 특혜 폐지 시도가 있었다. 2007년 임종인 당시 무소속 의원(현 법무법인 해마루 고문변호사)이 ‘전문직 시험 공무원 특혜 모두 폐지’를 담은 법안들을 제출했다. 회계사법, 세무사법 등을 일제히 개정해 시험 면제 혜택의 근거조항을 삭제한다는 게 뼈대였는데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임 전 의원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사회 전 분야의 특혜를 없애는 게 시대의 대세"라며 "공직자 관련 법률만 봐도 퇴직 후 취업제한 등의 규정이 있는데 시험 면제 조항을 두는 건 제도적 모순"이라고도 꼬집었다. 이어 "정치권이 이제라도 단계적 특혜 폐지나마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 "폐지는 갈등 유발할 수도"…해외처럼 '문턱높이기' 방안
물론 이 제도가 공직자 특혜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공무원 경력인정제도는 1960년대 세무사법·공인회계사법·법무사법·변리사법 제정으로 처음 도입됐다. 이어 1984년 공인노무사법, 1995년 관세사법 제정으로 점차 확대됐다. 공직자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고 근무 의욕을 고취한다는 게 도입 취지다.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대 1~3% 수준인 공무원 퇴직률이 1980~1990년대에는 3~5%로 비교적 높았다. 장기근속 유도 등의 도입 취지가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배경이다.
특히 제정 당시에는 시험 없이 자격증을 부여했으나, 2001년 ‘공정경쟁 방해’ 등 논란에 시험 일부 면제로 한 차례 완화된 제도다. 각 분야 실무 경험 및 공무에 대한 이해도를 갖춘 점을 존중할 필요성이 인정됐다.
이에 제도의 완전 폐지 대신 완화가 낫다는 시각도 있다. 모 지자체 고위공직자는 "면제요건을 아예 없애버리면 오히려 갈등이 불거질 수 있다"며 "MZ세대를 중심으로 공무원 경력이 인정되는 공공기관 이직을 바라는 인원이 적지 않아 이들로선 ‘기회의 박탈’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공무원의 자격증 취득 문턱을 높이는 방안도 거론된다. 시험 면제요건을 ‘근무 기간 중심’에서 ‘역량 입증 중심’으로 전환하는 쪽으로다.
해외 사례를 보면 독일은 ‘10년 이상 분야 전담 교수’, ‘10년 이상 한 분야 과장급 이상 지낸 공무원’ 등에 과목 면제 혜택이 주어진다. 미국은 ‘공직자로서 전문가임을 입증할 자료’를 심사받아야 하며, 일본은 ‘10년 이상 맡은 구체적인 담당 업무와 연관된 과목’의 면제 혜택을 받는다.
국회입법조사처도 2014년 '자격시험 공무원 경력인정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국민들의 공정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공무원 직종 선호도가 상승하는 등 입법 취지만으로는 제도의 존치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공무원 복리 후생 측면이 아닌, 공직자의 전문성을 활용한 대국민 서비스를 제고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진단한 바 있다.
법 개정 등이 현실화할 수 있을까. 국회 한 관계자는 "특혜 폐지의 공감대는 형성된 분위기지만 다각도의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며 "각 상임위 의원들이 공무원 및 이익집단의 저항을 극복할 의지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나"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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