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근 한동훈 감싸기' 인정한 법원…정치적 명분 '흔들'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법치'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내세운 핵심 가치다. 지난 3월 총장 임기를 4개월여 앞두고 사의를 표명할 때도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정치 행보를 시작하면서도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다시 세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배치된 법원의 판단이 나오면서 윤 전 총장의 정치적 명분이 흔들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전 총장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징계처분 취소 소송에서 법원은 판사사찰 등 윤 전 총장의 비위 혐의 대부분을 적법한 징계사유로 인정했다. 특히 '측근' 한동훈 검사장(사법연수원 부원장)이 연루된 사건의 감찰과 수사를 방해해 검찰의 공정성을 해쳤다는 판단이 나오면서 윤 전 총장은 궁지에 몰렸다.
20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정용석 부장판사)는 지난 14일 윤 전 총장이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낸 징계처분 소송에서 "정직 2개월 징계처분은 징계양정 범위의 하한보다 가볍다"며 법무부의 손을 들었다. 재판부는 윤 전 총장의 판사 불법사찰 의혹과 함께 채널A 사건 감찰·수사 방해도 징계사유로 판단했다.
◆ "윤석열-한동훈, 지속적 친분 관계"
판결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윤 전 총장과 한동훈 검사장의 관계에 대한 재판부의 분석이다. 재판부는 2003년부터 2019년까지 윤 전 총장과 한 검사장이 수차례 함께 근무했던 인연 등을 근거로 두 사람이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고 봤다. 정 부장판사는 "원고(윤 전 총장)와 한동훈 검사장은 직연 등 지속적인 친분으로 인해 일반인의 관점에서 공정한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수 있는 관계에 있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MBC가 '검언유착 의혹' 사건 보도를 한 시점은 지난해 3월31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같은 해 4월2일 대검에 진상확인 지시를 내렸다.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은 윤 전 총장에게 'MBC 보도 관련 장관 지시 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윤 전 총장에게 이를 보고했지만, 윤 전 총장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언론에 보도된 녹음파일의 음성이 한 검사장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이어 같은 달 7일 한동수 부장은 감찰개시 보고서를 작성해 윤 전 총장에게 보냈으나 윤 전 총장은 감찰 중단을 지시했다.
윤 전 총장은 자신의 승인이나 지시없이 감찰부장이 감찰개시를 장관에 보고한 것은 복종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윤 전 총장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감찰의 독립성 보장을 위해 총장의 승인 없이 감찰부장은 감찰을 개시할 수 있고, 윤 전 총장이 감찰을 중단시킨 것은 직무 범위에서 벗어난 조치라고 봤다.
◆ 한동훈 휴대전화 압수 소식에 '충격받은 윤석열'
윤 전 총장이 이 사건 수사를 방해한 부분도 부당한 개입이라고 지적했다. MBC 보도 이후 민주언론시민연합이 관련 인물들을 고발하자 윤 전 총장은 서울중앙지검에 수사를 지시했다. 이후 지난해 6월2일 한동훈 검사장의 피의자로 특정되자 윤 전 총장은 이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대검 부장회의에 위임했지만, 같은달 16일 이를 번복하고 전문수사자문단 소집을 지시했다. 수사팀의 재고 요청을 무시하고, 전문수사자문단 소집을 강행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윤 전 총장은 중앙지검이 한 검사장의 휴대전화를 압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받은 모습'을 보이면서 자문단 소집을 지시했다고 한다.
윤 전 총장은 중앙지검이 부장회의 지휘를 거부했기 때문에 수사자문단 소집이 필요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부장회의와 중앙지검 사이에 사건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수사자문단 소집이 필요하다고 볼 만한 사정이 전혀 없었다"며 기각했다. 이같은 조치는 공정성에 의심이 가는 부당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원고의 조치들은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거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해야 하는 직무상 의무에도 반하는 것"이라며 "자문단 소집은 한동훈 검사장에 대한 수사를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찍 종결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의심을 살 수 있는 매우 부당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 윤석열 정치적 명분도 '흔들'…고발사주 수사 주목
법원이 윤 전 총장이 측근을 지키기 위해 검찰권력을 사유화하고 남용했다는 법무부의 주장을 인정하면서 법치와 공정을 내세우던 윤 전 총장의 정치적 명분이 흔들린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헌법수호' 등 윤 전 총장이 말하던 것과 완전히 배치된다. 윤 전 총장이 사실상 헌법적 가치를 위배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며 "탄압을 주장하며 총장직을 사임한 행위의 정당성은 소멸한 것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법원이 인정한 윤 전 총장의 수사·감찰방해 과정은 '고발사주' 사건과도 궤를 같이한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이 텔레그램을 통해 '손준성 보냄'이라고 적힌 고발장을 받은 시점은 지난해 4월3일. 추미애 전 장관이 진상조사를 지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고발장 속 피해자는 윤 전 총장과 한 검사장, 김건희 씨 등 3명이었으며 검언유착 사건이 허위라는 주장이 담겼다.
윤 전 총장의 징계결정서 등에 따르면 윤 전 총장과 한 검사장은 지난해 3월31일 MBC 보도가 나온 시점부터 고발장이 전달 전날인 4월2일까지도 수차례 통화했다. 한 검사장과 손준성 전 대검 수사정보정책관, 권순정 당시 대검 대변인도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을 통해 수십 차례 대화를 나눴다. 고발장이 전달되기 전 이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의문이 더해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발사주 사건을 맡은 공수처의 수사에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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