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작가' 된 검찰총장, 열여섯살 꿈으로 돌아가다

조소 작가로 인생의 2막을 시작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며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새롬 기자

김준규 전 검찰총장 인터뷰…22일부터 첫 전시회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김준규 전 검찰총장을 인터넷 검색해보면 변호사라는 커리어가 가장 먼저 나온다. 이제 틀렸다. 변호사보다 '흙작가'를 앞에 둬야 맞다.

"마라톤 결승점을 통과했는데 계속 트랙을 돌고있는 느낌이랄까. 관중 보기도 부끄러운 거에요.(웃음) 계획된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지난 13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만난 그의 삶은 오래 전부터 2020년까지 계획이 짜여있었다. 딱 65세였다. 그 이후는 구상해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2019년 말 다니던 한 대형 로펌에 그만 두겠다고 작별을 고했다.

한때 정치하라는 권유도 있었다. 단칼에 잘랐다. 총장 퇴임 후 서초동도 조심스러웠던 그였다. 태어나고 자란 종로에 사무실을 냈더니 종로에 출마할 거란 말이 돌았다. 혼자 웃었다. 정치는 싫었다.

그에게는 예술가의 피가 흐른다. 선친 김형근(1918~1982) 선생은 피아니스트다. 버금딸림화음, 높은음자리표 같은 우리말 음악용어의 개척자다. 해방 후 첫 중학교 음악교과서인 '중등음악통론'(1949)의 저자이기도 하다. 검사가 되는 것을 못보고 돌아가신 아버지는 지금 아들 손에 흉상으로 다시 태어나 함께 산다.

"예술적 달란트는 좀 있었어요. 고1 때 조소반을 했고 미대 갈 생각도 있었지. 그런데 성적이 떨어지니까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공부해서 법대를 갔지."

알다시피 검사는 눈코 뜰 새 없는 직업이다. 잊었던 꿈은 먼 이국에서 다시 꾸었다. 미국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 시절이었다. 짬을 내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조소 강의를 들었다. 그때 초등학생이던 작은 딸을 모델로 이십여년 만에 흙을 빚었다.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다. 광주고검 차장검사 때는 조선대 미대 교수들과 교류하면서 꿈을 기억했다.

지금부터 딱 10년 전, 총장을 그만 두니 비로소 시간이 났다. 종로 사무실에서 인사동 갤러리가 가까웠다. 다시 손에 흙을 묻혔다. 그러다 2020년이 찾아왔다. 계획된 삶을 끝낼 때였다.

조소 작가로 인생의 2막을 시작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1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며 서재 한켠에 마련한 작업실을 공개하고 있다./이새롬 기자

법은 건조하다. 하지만 김준규는 촉촉하다. 그래서 흙이 좋다. 작품세계도 계산되고 사실적인 서양식보다는 거칠지만 느낌이 있는 우리식을 지향한다. '토우'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서양은 대리석으로 정교하게 조각을 하죠. 우리는 거칠고 깎기힘든 화강암을 써요.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화강암에도 해학을 다 넣었어요. 저도 계속 흙을 주장하면서 화강암식으로 내 영역을 만들고 싶어요."

지금까지 만든 작품 50개로 22~28일 서울 북촌 한옥갤러리 일백헌에서 첫 전시회 '흙을 만지며 다시, 나를 찾다'를 연다.

실패작인데 대표작이 된 '메멘토 모리'도 선뵌다. 김 전 총장의 '자소상'이다. 막상 내 얼굴을 만들어보니 마음같지 않았다. 내 얼굴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잘 몰랐던 거다. 머릿 속 내 모습은 내가 아니었다.

덧작업을 거듭하고 말리다가 흙이 터져 갈라졌다. 쓰레기통에 넣으려는 순간 문득 떠올랐다. '내가 죽을 때 모습이구나.' 딸들에게 당부했다. 아버지가 죽으면 '메멘토 모리'를 물에 담가달라고. 그럼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김 전 총장은 앞으로 작품을 100점까지 만드는 게 목표다. 국내에 비상업적 장르인 흙작품을 그정도 만든 작가는 손에 꼽는다. 고 권진규(1922~1973) 작가 정도다. 그는 김 전 총장이 가장 흠모하는 예술가다. 65세 넘은 늦깍이 작가가 '인생은 공(空)'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권진규의 세계까지 넘어설지 지켜볼 일이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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