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질환 인과관계 증명 부족"…"전문가 추정, 형사재판에 적용 못해"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유해 물질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해 사상자를 낸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 등에게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 물질과 피해자들의 질환 사이 인과관계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12일 오후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홍 전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 전 이마트·필러물산 임직원들의 선고 공판을 열고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가습기 살균제 물질이 천식, 폐 질환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킬 물질이어야 하고 피해자와 동일한 환경에서 가습기를 사용했을 때 그 물질이 사람의 폐에 도달해 이같은 질환을 일으키게 한다는 사실이 입증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뤄진 모든 실험 결과를 종합하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기 부족하다"며 "가습기 살균제 사용과 피해자 상해·사망 사이 인과관계가 인정됨을 전제로 한 나머지 쟁점에 관해서도 더 나아가 살펴볼 필요없이 범죄의 증명이 없다"고 판시했다.
원료 물질의 유해성을 실험한 전문가들의 의견에 대해 재판부는 "박사와 교수 등 전문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실험 결과 원료 물질과 폐 질환 사이 인과관계가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법정에서) 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미 사망과 상해 결과가 발생한 상황 속 원인을 보충하고 확인하는 측면에서 이뤄진 실험"이라며 "가정에 부합하는 결과가 나와야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아 연구자의 결론이 편향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살균제 물질과 피해 사이) 인과관계가 합리적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돼야 하는 형사재판에서, 전문가들의 추정 내지 의견에 기초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7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로 인정된 것에 대해서도 "피해 인정 절차는 국가가 피해자 구제 차원에서 인정 기준을 순차적으로 완화했는데, 피해자 구제를 목적으로 폭넓게 피해자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는 형사사건에서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선고 도중 "가습기 참사를 바라보는 심정은 안타깝고 착잡하기 그지없다"며 짧게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면서 "향후 추가 연구 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이 판결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르겠다. 다만 재판부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증거를 바탕으로 형사사법의 근본적 원칙 범위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안 전 대표는 SK케미칼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2002~2011년까지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해 판매하는 과정에서 원료 물질인 클로로메틸아소티아졸리논(CMIT) 및 메틸아소티아졸리논(MIT)의 안전성을 확인하지 않는 등 주의 의무를 위반해 사상자를 낸 혐의로 불구속기소 됐다.
홍 전 대표는 애경산업과 함께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해 판매하면서 독성 원료 시험과 같은 안전성 검사를 하지 않아 사상자를 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달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안 전 대표와 홍 전 대표에게 각각 법정 최고형인 금고 5년을 구형했다.
함께 기소된 전 애경산업, SK케미칼 임직원과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업체인 전 이마트 임직원, 전 필러물산 대표 등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5년을 구형했다.
홍 전 대표는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에게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피해자들에게 할 말씀 없으시냐' 등의 질문을 받았지만 모두 답하지 않고 빠르게 법원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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