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위상 강화' 검토한 판사는 "지시 받았지만 다 내 생각"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사법농단 의혹의 '키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 '알쏭달쏭'한 증언이 이어졌다. 법원행정처에서 재판 개입성 문건을 주는 건 이상했지만 내용은 타당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임 전 차장의 지시로 문건을 작성했지만 내용은 모두 자신의 생각이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지난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윤종섭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임 전 차장의 속행 공판에는 2014년 광주지법에 접수된 통합진보당 잔여재산 사건의 주심 판사였던 A 판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A 판사는 2014년 12월 법원행정처에게 통진당 잔여재산 환수 방식은 가처분이 적절하다는 취지의 자료를 이메일로 받은 사실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메일을 확인하기 전날 최우진 당시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심의관에게 "이메일을 확인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도 했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재판부에 통진당 잔여재산은 가처분 방식으로 처분해야 한다는 특정 결론이 담긴 문건을 전달해 각 법관의 독립성을 해쳤다고 본다. 가처분 방식이 적절하다는 판단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합의한 결론이라는 것이 공소사실이다.
A 판사 역시 법원행정처에서 판사 개인을 접촉해 진행 중인 사건 자료를 보낸 건 생소한 일이라고 증언했다. A 판사는 "통상 법원행정처 자료는 각 법원 기획법관이 배포하는데, 법원행정처에서 전화가 와 제 이름을 찾는 게 생소했다"며 "진행 중인 사건 때문에 법원행정처에서 (판사를) 개별 접촉해 이메일을 송부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A 판사는 법원행정처의 자료에 법리적 오류는 없었고, 가처분 결론은 지금 생각해도 타당한 판단이었다고 거듭 밝혔다. 또 이메일을 확인해달라는 최 전 심의관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자료대로 결론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았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사법농단 의혹을 관통하는 공소사실인 재판 개입의 핵심은 법관의 독립성 침해에 있다. 법원행정처의 판단이 얼마나 타당했는지, A 판사가 얼마나 큰 압박을 느꼈는지에 앞서 따져볼 점은 법원행정처 문건이라는 외부 자료로 법관의 심증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았는지가 관건이다.
앞선 검찰 조사에서 A 판사는 "당시 법관 경력이 많지 않아 법원행정처로부터 받은 자료에 위화감이 들었다. 해당 자료에 동화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검찰과 변호인 모두 A 판사에게 이같은 진술을 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A 판사는 "사실대로 답변한 것"이라고 일관했다. 다만 자료에 법리적 오류가 있었다면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22일 재판에는 정다주 부장판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이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기획조정심의관으로 근무했다.
정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관련 각계 동향부터 판사들의 온라인 모임인 '이판사판 야단법석' 카페 동향 등을 파악해 여러 문건을 작성했다. 그의 문건들은 사법농단 사건 공소장을 작성하는데 근거가 됐다.
이날 화두에 오른 문건은 '헌법재판소와 관계에서 대법원 이미지 설정 방향'이라는 제목의 문건이었다. 대법원이 최고의 사법기관으로서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헌재와 관계에서 대법원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헌재 내부 회의 자료를 빼돌리거나, 헌재와 겹치는 사건의 재판에 개입했다는 것이 공소사실이다. 대법원 위상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 부장판사의 문건은 이같은 범행배경을 입증하는데 주요한 증거였다.
이날 정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에게 이같은 문건 작성을 지시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는 "법원행정처 내에서 대법원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고, 임 전 차장 역시 헌재와의 관계에서 대법원의 위상 재고에 관심이 있었다"며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 부장판사의 문건은 대법원 위상 강화라는 주제를 검토하게 된 배경과, 위상 유지의 중요성이 각 항목별로 자세히 정리돼 있었다. 그는 작성 지시 자체를 임 전 차장에게 받은 건 맞지만, 문건 속 세부 내용은 모두 자신의 '독창적 생각'이라고 했다. 정 부장판사는 "(작성) 지시자가 자신의 생각을 문서 형태로 정리해주길 바랄 때도 있고, 추상적인 주제만 주고 폭넓게 연구해 작성해주길 바라는 경우가 있다"며 "(해당 문건은) 저의 독창적 생각에 가깝다"고 말했다.
정 부장판사는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를 면했다. 이처럼 '실무자'의 단독 행위라는 사실이 인정되면 기소된 지시자는 혐의를 벗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검찰 수사 정보를 법원행정처에 빼돌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전 법원장이 수사 정보를 수집해 빼돌리라는 지시를 한 사실이 없다고 판시한 것이 컸다.
이 전 법원장의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당시 서울서부지법의 기획법관이던 나상훈 부장판사가 직무상 알게된 비밀을 법원행정처에 건넨 사실은 인정했다. 이는 수사기관의 업무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는 이 전 법원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닌 나 부장판사 '스스로' 한 일로 보인다고 했다.
나 부장판사 역시 사법농단 의혹으로 형사입건돼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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