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사법농단 vs 여성·아동인권…'명암' 엇갈린 권순일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사진)이 대법관 임기 6년을 마치고 8일 퇴임한다. /대법원 제공

'사법농단 공소장 적시'에 곤욕…퇴임식 없이 임기 만료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권순일 대법관이 대법관 임기 6년을 마치고 8일 퇴임한다. 권 대법관은 임기 중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공소장에도 적시되는 곤욕을 치렀다. 동시에 성인지 감수성과 아동의 출생등록권 존중 등 인권에 귀 기울인 법관으로도 평가 받았다.

권 대법관은 지난 2014년 9월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충남 논산 출신의 권 대법관은 대전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대법관에 지명되기 직전까지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했다.

권 대법관이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근무한 시기는 사법농단 사건 공소사실상 범행 시기와 겹친다. 이에 따라 지난해 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적시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서 총 14회 등장하는 권 대법관은 이른바 '법관 블랙리스트'로 알려진 물의야기 법관 검토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같은 해 징계도 거론됐지만 결국 제외됐다.

참여연대는 권 대법관 퇴임을 맞아 낸 논평에서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에 임해야 할 고위 법관이 사법불신을 초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채 임기를 끝마친다는 것은 남은 법관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 지명된 만큼 보수 성향 법관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긴급조치 사건 피해자들의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은 판례가 대표적이다. 2015년 3월 대법원 3부의 주심을 맡았던 권 대법관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동을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해석하고, 정치적 책임은 있지만 민사상 불법 행위로는 볼 수 없다고 봤다. 이에 따라 권 대법관은 피해자들은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지난 2018년 4월에는 '양승태 대법원'이 재판 거래를 한 사건으로 알려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사건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권 대법관은 조재연 대법관과 함께 박정희 정부 당시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피해자의 개인보상청구권이 소멸됐으며, 한국 정부 차원에서 보상책을 마련해야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박근혜 정부 입장과 유사한 논리다. 주심 김소영 대법관을 비롯한 과반수 대법관들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하면서 해당 사건은 국내 소송 13년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결론났다.

권순일 대법관은 여성과 아동 등 사회적 약자 인권에 유의미한 판례를 내놓는 대법관으로도 꼽힌다. 사진은 지난 2014년 대법관 후보자 시절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질의에 답하는 권 대법관의 모습. /임영무 기자

권 대법관은 여성과 아동 등 사회적 약자 인권 문제에선 열린 시각을 보여줬다.

지난 2018년 4월 권 대법관은 학생을 성희롱해 해임된 대학교수의 해임을 취소하라고 한 2심 판결을 놓고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판결이라며 원심을 깨고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권 대법관은 당시 판결에서 "판사들이 피해자들의 진술을 심리할 때 성범죄의 특수성과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또 피해자들이 가해자 및 남성 중심 사회 안에서 피해 사실 진술을 두려워한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인지 감수성을 처음으로 판시해 법조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 권 대법관은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성남지사의 사건을 배당받았다. 하지만 권 대법관은 안 전 지사와 같은 충남 논산 출신이라는 연고 관계가 있다며 재판부 재배당을 요청했다. 대법은 이를 받아들여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로 사건을 넘겼으나, 새 재판부 역시 권 대법관이 판시한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해 안 전 지사의 성범죄 혐의를 유죄로 봤다. 이처럼 권 대법관의 선례는 성범죄 사건을 심리하는 각급 법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동의 출생등록권을 처음으로 인정하며 미혼부의 출생 신고 문을 넓힌 것도 권 대법관이다. 아이 친모의 인적 사항을 알 경우, 미혼부 혼자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에 불복한 미혼부 A씨가 재항고한 사건이었다. 권 대법관은 "아이의 출생 신고는 법률이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라며 A씨의 신청을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누구나 출생등록권을 지니며, 이 기본권은 법원도 제한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특별한 법 개정없이 판례만으로 아동의 출생등록권을 존중하고, 미혼부의 출생 신고 절차를 간소화한 판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권순일 대법관 퇴임의 후임 이흥구 후보자에 대한 대법관 임명 동의안이 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사진은 이 후보자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선서하는 모습. /배정한 기자

권 대법관은 별도의 퇴임식이나 퇴임사 없이 대법원을 떠난다.

다만 지난달 출간된 권 대법관의 저서 '공화국과 법치주의'에서 다사다난했던 법관생활의 소회를 엿볼 수 있다. 대법원 관계자에 따르면 권 대법관은 해당 저서 머리말로 퇴임사를 갈음하길 원했다고 한다.

머리말에서 권 대법관은 "젊은 나이에 판사로 출발해 환갑을 지나도록 공직 생활을 했으니 개인적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급변하는 것을 지켜봤고 그 와중에 법관생활을 해 감회가 적지는 않지만, 법조인으로서 한 길을 꾸준히 걸었을 뿐이어서 회고록을 쓸 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법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열띤 토론과 비판을 함께 한 선후배 동료 법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전했다.

그의 후임인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 역시 취임식 없이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이 후보자는 서울대 재학 시절 이른바 '깃발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3년의 실형을 선고 받은 전력이 있다. 이 후보자는 후보자 지명 당시 권 대법관과 반대로 '진보 성향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 대법관에게 실형을 선고한 재판부의 주심은 권 대법관이었다. 판사와 피고인이 35년이 지난 이날 대법관 전·후임으로 만나 바통 터치를 하게 됐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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