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지휘권 발동에 총장 퇴진 '파국'…반복 가능성은 희박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총장직에 임해왔기 때문에 전혀 뜻밖의 일은 아닙니다."
2005년 10월 17일 김종빈 전 검찰총장이 사퇴하면서 꺼낸 말이다. 하루하루가 마지막 날이었다는 김 전 총장과 드물었던 '비검사' 출신 법무 장관인 천정배 당시 장관은 임기가 겹친 5개월 동안 살얼음판을 걸었다.
천 장관은 같은해 5월 취임과 함께 "검찰을 개혁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검찰에 대한 어떠한 부당한 외압도 용납하지 않는 튼튼한 울타리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검찰을 다독이는 듯 했다.
'데탕트'는 오래가지 못 했다. '안기부 X파일 사건', '대상그룹 비자금 봐주기 수사 의혹'이 터져나왔다.
"필요하다면 구체적인 사건에도 지휘권을 행사해 나가겠다."(천정배 장관)
"지휘가 내려와도 비합리적인 부분까지 승복할 이유는 없다."(김종빈 총장)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은 하루 간격으로 비수를 품은 메시지를 던지며 험난한 미래를 예고했다.
전운을 품은 정적은 '강정구 동국대 교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깨뜨렸다. 강정구 교수는 당시 인터넷 매체 '데일리서프라이즈'에 "6.25전쟁은 내전이며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전쟁"이라는 글을 기고했다가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김 총장이 구속 방침을 밝히자 천 장관은 "헌법과 법률상 구속사유를 충족하지 못했다"며 불구속 수사하라는 수사지휘권 카드를 꺼내들었다.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총장은 수사 지휘를 받아들인 뒤 검찰총장 임기제 실시 후 임기를 채우지 못 한 8번째 총장이 됐다.
김 총장을 태운 차가 대검 직원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대검찰청사를 빠져나간 지 15년 만에 서초동에 '데자뷔'가 펼쳐졌다.
추미애 장관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불법 정치자금 사건 위증교사 의혹을 대검 감찰부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법무부는 한 전 총리 재판 당시 검찰 측 증인이었던 최모 씨가 "검찰의 모해위증교사가 있었다"고 진정을 내자 대검 감찰부 감찰3과가 조사하라고 '콕 찍어' 내려보냈다. 감찰부는 강제수사권을 가진 건 물론 검사와 수사관 등 수사인력도 풍부한 조직이다. 감찰부장도 외부공모로 임명된 비검사 출신이다.
윤석열 총장은 추 장관이 지정한 감찰부에서 방향을 틀어 대검 인권부로 조사를 재배당했다. 인권부는 다시 서울중앙지검 인권감독관실로 내려보냈다. "징계시효(5년)가 지나 감찰부 소관이 아니다"라는 이유다. 윤 총장은 지난 4월 채널A-한모 검사장 '검언유착' 의혹이 제기됐을 때도 감찰부가 아닌 인권부에 진상조사를 지시해 논란에 부딪혔다.
추미애 장관은 감찰부 직접 조사 지시를 내리면서 "이미 감찰부에 가 있는 사건을 재배당해 인권감독관에게 내려보내는 과정에 상당한 편법과 무리가 있었다"며 윤 총장에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뒤 이어 여권 인사들 사이에서는 윤 총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나라면 벌써 물러났다", 우희종 전 더불어시민당 대표는 "눈치가 없는 거냐, 불필요한 자존심이냐"라며 사퇴를 압박했다.
추 장관과 윤 총장 사이 긴장 고조가 15년 전 총장 사퇴로 이어진 파국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다만 반복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천-김' 사례는 구체적인 사건 수사를 놓고 벌어진 것이지만 이번은 진정 조사 주체가 쟁점이다.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진다. 윤 총장도 추 장관의 지시에 가타부타 말을 아낀다.
여권의 사퇴 요구는 산발적일 뿐 공식적·조직적인 것은 아니다. 남북관계·코로나19·경제위기 등 '삼중고'를 맞은 여권이 폭발력이 큰 검찰총장 거취 문제를 밥상 위에 올려놓을 여력도 크지않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총선 승리 후 "개헌이나 검찰총장 이야기보다 코로나 국난 극복, 경제위기 해소, 일자리 문제가 더 급하다"고 못 박은 바 있다.
윤 총장도 법에 명시된 2년 임기 보장이 검찰 독립성 확보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에서도 윤 총장이 자리를 유지하기만 해도 의미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치적 감각이 발달한 검찰 조직문화를 볼 때 윤 총장은 만에 하나 물러나더라도 '최적의 타이밍'을 찾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2013년 서울중앙지검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 외압을 폭로해 효과를 극대화한 것도 한 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조국 전 장관 재판 등 자신이 벌여놓은 주요 사건의 수사와 공소유지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추 장관의 행보는 윤 총장의 거취보다는 7월 이후를 바라 본 전주곡이라는 진단이 많다. 검찰 정기인사와 검찰개혁 후속작업,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출범을 위한 땅 다지기라는 해석이다.
7월 인사는 '윤석열 라인'을 집단 좌천한 2월 인사에 쐐기를 박는 양상이 예상된다. 특수부 등 인지수사 부서 출신에서 형사·공판부 출신으로 검찰 내 권력이동이 한층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검찰개혁 후속작업은 대통령령으로 정한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를 더욱 좁히고 법무검찰개혁위원회 권고를 대거 실행하는 방향으로 가속도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한 전 총리 사건 조작 의혹을 비롯해 윤 총장 가족 관련 사건, 현직 검사장이 거론되는 검언유착 사건,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수사 검사 불기소 등은 공수처 출범의 정당성을 강화시키는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추 장관 등 여권이 윤 총장의 거취에 집착한다면 자충수가 되리라는 지적도 많다. 노무현정부 당시 송광수·김종빈 총장이 정부와 갈등 속에 중도 퇴진했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전투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진' 결과를 빚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의 퇴진을 거론할 정도로 확인된 사실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도 조국 전 장관 퇴진 요구 때는 물러날 만큼 법적으로 책임질 게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무리한 윤석열 때리기는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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