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48시간 내 사후영장 청구" 판결한 원심 파기
[더팩트ㅣ송은화 기자] 여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사진 등이 담긴 휴대전화를 경찰이 현장에서 압수했더라도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내려졌다. 현행범 체포현장에서 임의로 제출된 물건은 형사소송법에 따라 사후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원심 판단을 뒤집은 결론이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일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의정부지방법원에 돌려보냈다고 26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018년 5월 11일 오후 9시 49분께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에 있는 한 지하철역 출구 상행 에스컬레이터에서 휴대전화로 여성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현장에서 압수된 A씨의 휴대전화에는 2018년 3월부터 5월까지 총 11회에 걸쳐 같은 방법으로 여성들의 신체를 촬영한 사진 등이 담겼다.
1심은 A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1년 2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와 아동·청소년 등 관련 기관에 대한 5년간 취업제한도 명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총 5명의 피해자를 상대로 치마속, 다리 등을 촬영하는 범행을 저질렀고, 2012년에는 강간치상죄로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한 전력이 있다"면서도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배우자와 네 자녀를 부양하고 있어 피고인의 구금은 가족들의 생계에 큰 곤란을 초래할 것으로 보인다"며 형량을 결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항소심 법원 판단은 달랐다. 2심 법원은 "휴대전화에 대한 수사기관의 압수절차가 위법하다"며 이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파기하고 A씨에 대한 일부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2심 법원은 2018년 3월 7일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에게 압수된 A씨 휴대전화를 문제삼았다. 경찰이 A씨를 석방한 뒤에도 사후 압수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채 휴대전화에 대한 압수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 휴대전화에서 A씨가 촬영한 여성사진을 찾아 CD에 복제하고, 해당 사진들을 출력해 피의자 신문조서에 첨부해 A씨를 재판에 넘겼다.
형사소송법상 현행범 체포 현장이더라도 영장 없는 압수수색은 허용되지 않고, 상황이 급박해 증거를 임의 제출받았더라도 사후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 그러나 경찰은 A씨를 검거한 뒤에도 사후 영장을 발부받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탐색해 증거를 추출하는 과정에 A씨를 참여시키지도 않았다. 이에 항소심 재판부는 이같은 경찰의 행위가 잘못됐다고 판단해 이를 무죄 선고했다.
대법원은 원심의 결정을 다시 뒤집었다. 원심판결 중 무죄 부분을 파기하고, 사건을 의정부지방법원으로 환송했다.
대법원은 "원심은 1심에서 전혀 쟁점이 되지 않았던 휴대전화기 제출의 임의성을 직권으로 판단하기 전에 추가 증거조사를 하거나, 임의성을 증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검사에게 증명을 촉구하는 등의 방법으로 더 심리한 뒤 판단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휴대전화기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심의 판단에는 현행범 체포현장에서의 임의제출물 압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휴재전화기 제출의 임의성에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 원심을 심리한 의정부지방법원 제1형사부(재판장 오원찬 부장판사)는 2019년부터 최근까지 경찰의 미흡한 수사를 지적하며 휴대전화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선고를 여러 건 했다. 또 여성의 신체를 불법으로 촬영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한 1심 판단을 뒤집어 무죄 선고한 재판부로 알려졌다.
우선 오 부장판사 등은 2019년 8월 28일 여성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하다 지하철수사대 경찰관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된 B씨 사건에서도 같은 이유로 이 휴대전화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2018년 5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여성 화장실에 몰래 들어가 불법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C씨 사건에서도 벌금 600만원을 선고한 1심을 파기하고 일부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이는 대법원 판례에 배치된다. 대법은 지난 2016년 2월 현행범 체포 현장이나 장소에서 소지자 등이 임의로 제출하는 물건은 영장없이 압수할 수 있고,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사후에 영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결했다.
이에 오 재판장 등은 "현행범으로 체포된 피의자가 소지하던 물건은 형사소송법 등에 따라 영장 없이 압수수색 할 수 없다"며 "대법원 판례에 어긋나기는 하나 영장주의 원칙에는 오히려 충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긴급압수 뒤 48시간 이내 사후영장을 발부받으면 되므로 이와 같은 해석이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의정부지법 제1형사부는 또 술에 취해 잠든 여성의 나체사진을 찍어 SNS에 올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SNS로 사진을 전송한 시점을 전후해 피해자와 나눈 대화 등으로 비춰 볼때 피해자 몰래 사진을 촬영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면서도 "피해자에게 사진을 전송해 보여줄 경우 강력 항의는 물론 형사책임까지 물으려 할 가능성이 충분히 예상되는데도 피해자에게 사진을 전송했다"며 "피고인에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촬영했다는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로 판단한 이유를 밝혔다.
앞서 1심은 이 남성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 역시 무죄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다시 의정부지법으로 돌려 보냈다.
오 부장판사 등은 지난해 10월 24일 버스에서 레깅스 바지를 입은 여성의 엉덩이 부위 등을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벌금 70만원을 선고한 1심 법원 판단을 뒤집은 결과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가 부적절하고 피해자에게 불쾌감을 유발했다"면서도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무죄로 판단한 이유를 설명했다. 또 "피해자가 당시 입고 있던 레깅스는 피해자와 비슷한 연령대 여성들 사이에서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있고, 피해자 역시 레깅스를 입고 대중교통에 탑승해 이동한 만큼, 레깅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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