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바·정경심도 격돌 중인 '타인의 형사사건'이란?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중요한 건 타인의 사건이냐, 아니냐인데 피고인들이 타인의 어떤 사건을 위해 증거를 인멸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재판장)
"전체적으로 다 해당됩니다." (검찰)
"그렇게 얘기하지마시고요. 그 '전체적으로 다 해당되는' 사건들 다 적어주세요. 뭐뭐인가요?" (재판장)
증거인멸 혐의를 받는 삼성바이오 임직원들의 항소심 첫 공판이 열린 법정에서 오간 대화다. 이들은 분식회계 의혹이 불거지자 관련 자료를 인멸·은닉하라고 지시하거나 실행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장은 공장 마룻바닥을 뜯어낼 정도로 감춰야 했던 '타인의 사건'을 피고인 7명에 대해 각각 명시하라고 검찰에 일침했다. 이들은 이미 1심에서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고 수뇌부에 있던 3명은 법정구속됐다. 그럼에도 재판장은 전제 사건을 분명히 해달라고 거듭 강조했다. '타인의 형사사건'은 증거인멸 범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이다.
◆타인은 누구인가?
형법 제155조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은닉·위조하거나 변조·위조된 증거를 사용한 자는 5년 이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여기서 타인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은닉한 자는 증거인멸 정범이 되고, 이를 지시한 사람은 교사범이 된다. 삼성바이오 임직원 7명을 살펴 보면, 삼성 컨트롤타워에서 열린 이른바 '어린이날 회의' 결과를 토대로 부하 직원들에게 증거인멸을 지시한 삼성전자 재경팀 이모 부사장,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소속 김모 부사장과 박모 부사장은 교사범으로, 가장 무거운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행 형법은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감추려 증거를 인멸한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감추려는 '본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형사처벌을 막기 위해 증거인멸을 지시하거나, 타인의 형사처벌을 막기 위해 증거를 인멸한 사람이 처벌대상이다. 다만 형법은 가까운 사람의 형사처벌을 막기 위해 증거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의 본능도 인정한다. 친족 또는 동거하는 가족을 위해 증거를 인멸하면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실제로 자식의 죄를 감추려 증거를 숨긴 부모를 처벌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딸의 친구를 살해한 '어금니아빠' 이영학(38)의 어머니는 아들의 범행도구를 불태웠지만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에는 현직 순경이 동료와의 성관계 영상을 유포한 일이 발생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영상이 담긴 휴대전화는 이미 강물에 던져진 뒤였다. 강물에 던진 사람은 순경의 아버지였다. 지난 1월 아들은 성범죄 혐의로 기소됐지만 아버지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삼성바이오 임직원들의 재판에서는 '친족상도례'가 언급됐다. 8촌이내 혈족이나 4촌이내 인척, 배우자간 발생한 재산범죄는 형을 면제하거나 고소가 있어야만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지난해 10월 1심 재판 중 변호인단은 피고인들이 길게는 수십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회사를 피를 나눈 가족처럼 생각해 증거인멸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회사의 위기가 곧 자신의 위기였고, '국정농단' 사태에 이어 분식회계 의혹까지 불거지며 압수수색이라면 학을 떼던 중 이같은 행위를 저지르게 됐다는 내용이다. 유사한 논리로 기업과 직원은 동일 개체라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 한 행위와 다름없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기업은 법인으로서 법이 정한 또 하나의 인격으로 타인이다. 법인을 소유한 오너도 돈을 빼돌리면 법인에 피해를 줬다며 횡령죄로 처벌되는 것도 이같은 맥락이다. 두 달 뒤 1심 재판부는 "일반인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범행 방식"이라며 피고인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형사사건은 무엇인가?
삼성바이오 임직원들은 형이 너무 무겁다고 불복했고, 검찰 역시 죄질에 비해 형이 가볍다고 항소했다. 항소심의 또 다른 쟁점은 바로 이들이 증거를 감춘 형사사건이 무엇인가다. 검찰은 이재용(52)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승계 작업 일환으로 장부를 조작한 분식회계 행위를 숨기려 증거를 인멸했다고 본다. 변호인단은 원심 때와 마찬가지로 "장부 작성에 위법성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법리상 증거인멸죄는 전제가 되는 사건 유무죄와 상관없이 얼마나 '국가의 형사사법 기능'을 방해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증거인멸죄에 있어 형사사건은 유무죄는 물론 기소 여부도 불문한다. 공소 제기와 형사처벌을 예상하고 벌이는 행위라 아직 당국의 수사가 개시 전 행위도 증거인멸죄 처벌대상이 된다. 다만 사건내용 자체가 형법이 금지하는 범죄가 아니면 예외가 된다. 사모펀드 의혹 관련 혐의를 감추려 증거인멸을 지시한 혐의를 받는 정경심(58) 동양대학교 교수 측 변호인단의 주장이다.
"피고인이 투자한 사모펀드 운용사 코링크프라이빗에쿼티(코링크PE) 실소유주가 5촌 시조카라고 해서, 또 펀드 투자처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해서 범죄사실이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투자처를 알면서도 블라인드 펀드라고 속였다고 하시는데, 블라인드 펀드인지 아닌지 자체가 형사사건이나 징계사건이 아닙니다." (2월12일 4차 공판)
당초 검찰이 의혹을 제기한 부분이 모두 사실이더라도, 유무죄를 따지기는커녕 공소를 제기할 '형사사건'이 되지 않아 증거인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이에 검찰은 "살인사건 피의자가 현장에 간 사실은 죄가 아니지만 자기 범행의 전제인 살인 현장에 간 사실을 숨기려 CCTV를 숨겼다면 살인사건에 대한 증거인멸이나 위조"라고 했다.
◆증거인멸의 다른 이름 '사법방해'
증거인멸죄는 재판도 재판이지만, 사회 전반에서 잡음이 있는 범죄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면 죄가 아닌데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추면 처벌된다는 점에서 국민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고, 법 감정에도 따르지 못한다는 이유다. 법조계에서도 자신의 형사사건에 관한 증거인멸에 면죄부를 주며 국가 사법기능이 방해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수사·사법 작용을 고의로 방해한 행위를 폭넓게 보고 처벌하는 사법방해죄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를 규정한 미국은 증거를 숨기거나 인멸하는 행위, 허위자료를 제출, 증인이나 배심원의 출석을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것까지 모두 사법방해죄로 본다. 이외에도 프랑스와 중국에서도 사법방해죄를 형법에 두고 있다.
하지만 자수와 수사 협조에 따른 이익이 부족한 한국 형사사법체계에서는 시기상조다. 이필우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입법발전소)는 "사법방해죄를 도입한 국가는 자수감경과 수사협조를 양형 참작 사유로 크게 보고 있다. 쉽게 말해 자수하고 수사에 잘 협조할수록 그만큼 보상을 해주니, 범죄자도 죄를 숨기는 것보다 죗값을 치루고 반성해서 사회에 복귀하는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라며 "사법방해죄를 도입하려면 이러한 양형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형벌체계가 수반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주어진 조건에서 증거인멸죄에 관한 논쟁을 조금이라고 식히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전문가들은 전제가 되는 형사사건 진범을 재판에 넘겨 결과를 지켜본 뒤 증거인멸 사건을 다뤄야 한다고 제안한다. 승재현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본죄가 되는 형사사건을 특정하고, 적어도 진범을 기소한 뒤 증거인멸 사건을 다루는게 순서상 맞다. 객관적,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도 효과적이라 형사사법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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