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초점]'심신미약’ 더이상 법원에서 안 통한다

대법원. / 더팩트 DB

대법, 술 취해 경비원 살해한 피고인 원심대로 확정

[더팩트ㅣ송은화 기자] 과거에는 심신미약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는 필수로 형을 감경해줬다. 하지만 2018년 12월 형법 개정으로 재판부가 죄질이나 사건의 성격 등을 고려해 감형을 결정하는 사례가 느는 추세다.

형법 제 10조 2항에 따르면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 1953년 심신미약 감경 규정이 제정된지 65년여 만에 '감경한다'에서 '감경할 수 있다'로 개정됐다. 의무에서 선택사항으로 전환된 것이다.

2018년 10월 '서울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 씨는 사건 직후 경찰에 우울증 진단서를 제출하는 등 약물에 따른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 씨가 심신미약으로 처벌을 피하려한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어 해당 법 조항이 개정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법원도 심신미약 상태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범행 동기 등을 검토했을 때 원심이 선고한 형량을 줄일 수 없다는 결론을 연이어 내놓았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70대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살인한 사건에서 심신미약을 주장한 피고인의 진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은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최 모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8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7일 밝혔다.

최 씨는 술에 취해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 서대문구 한 아파트 경비원 A씨의 머리를 발등으로 여러차례 폭행해 사망하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최 씨는 평소 층간소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A씨 등 관리업체에 요구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이 만족할 만큼 해결해 주지 않자 앙심을 품어왔다.

그는 식당에서 행패를 부린 혐의로 약식기소돼 벌금을 내게 됐다. 이 식당에서 보복을 하려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 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분풀이로 경비실에 혼자있던 A씨를 폭행해 머리손상으로 사망하게 했다.

최 씨는 "살해할 고의가 없었다"며 "범행 당시 술에 만취해 심신상실,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앞서 1·2심 살인의 고의를 인정해 최 씨에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식당에서 벌금 300만원을 물게 됐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며 항의한 것을 보면 이 사건 범행 직전까지도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시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거나,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 역시 최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유지했다.

(기사 내용과 상관 없음) 사진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한 고시원에서 공무원 시험에 대비해 공부하고 있는 공시생의 모습. /더팩트 DB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도 설겆이를 하던 고시원 업주 B씨의 목과 옆구리를 미리 준비한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박 모씨에 대해 유죄로 최종 결론 내렸다. 대법은 살인 및 절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 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7일 밝혔다.

박 씨 역시 우울증 및 불안장애 등을 호소하며 범죄 당시 사물변별능력 등이 미약한 상태였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기 부천시 한 고시원에서 총무로 일하던 박 씨는 입주자들에게 고시원 요금을 자신의 은행 계좌로 받아 임의로 사용했다. 범행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업주 B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날로부터 이틀 뒤 B씨를 숨지게 했다. 또 같은날 B씨 지갑에 있던 현금 25만원을 훔치는 등 절도 및 업무상횡령 혐의도 받는다. 특히 박 씨는 이미 절도 혐의 등으로 세번 이상 징역형을 받아 누범기간에 다시 절도죄를 범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배심원 9명은 만장일치로 유죄 판결을 내렸고, 징역 25년이 선고됐다. 1명을 제외한 8명이 징역 25년을 선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배심원 전원이 박 씨의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은 박 씨가 2018년 2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약 1년간 1~2주에 한 번 신경정신과 의원을 내원해 우울증과 불면증 약을 처방받은 사실은 인정했다. 2018년 3월부터 2달간은 알코올 의존 증후군과 불안장애로 입원치료를 받았다는 점도 참작했다. 그러면서도 "의원에서는 약만 처방받았지 심층 면담을 받지 않았다"며 "입원치료 후 퇴원 2주 전부터 증상이 호전됐던 것으로 보이고, 추가 진단이나 치료가 필요하다는 병원의 소견이 없는 등 피고인의 상태가 정신분열증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박 씨는 경찰 조사에서 "누군가를 죽이라는 환청이 들려 범행했다"고 진술했지만 법원은 심신미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미리 준비한 흉기로 B씨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등 일련의 범행 과정은 환청에 따른 충동적 행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 역시 박 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징역 25년의 원심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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