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더 복잡해진 직권남용죄 …'사법농단'에 면죄부 주나

30일 대법원이 직권남용죄를 두고 의무없는 일에 대한 면밀한 심리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판례를 내놓은 가운데, 47개 혐의 중 41개 혐의가 직권남용인 양승태(72)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사태 재판 전개에 관심이 모인다. 사진은 보석을 허가받은 지난해 7월22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는 양 전 원장의 모습. /남용희 기자

대법,'의무없는 일'까지 쟁점화…"결국 판사 심증에 달려" 의견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핵심인물 김기춘(81)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54) 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장관이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들의 주요 혐의인 직권남용죄를 놓고 "직권을 남용한 건 맞지만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의무 없는 일'을 한 건지 모호해 범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에 따라 이미 재판이 진행 중인 다른 직권남용 사건 판단에 영향을 줄지 관심이 모인다.

대법원이 지적한 직권남용죄의 정의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함으로써 성립하는 죄"다. 직권남용 사건은 주로 기소된 피고인의 행위가 직무 범위에 속하는지가 쟁점이다.

대법원 심판대에 올랐던 김 전 비서실장 역시 1심과 항소심에서 직권을 기준으로 희비가 교차했다. 1심 재판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보수단체 지원을 요구한 혐의는 "비서실장 직무 권한에 속하지 않아 직권남용죄로 볼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지만, 2심에서는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속함은 물론 김 전 실장을 정점으로 한 사건"이라며 유죄로 봤다.

하지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뜨거운 감자였던 직무 범위와 남용 기준 확립 대신 '의무없는 일'에 판단을 내놨다. 전원합의체는 "피고인들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해 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 배제를 지시한 건 헌법과 법률에 위배돼 위원회 소속 위원의 직무상 독립성을 침해한 직권의 남용에 해당한다"면서도 "의무없는 일에 해당하는지는 직권을 남용했는지와 별도로 법령상 의무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한 "명단 송부 행위와 심의 진행 상황 보고 등 행위가 종전에 한 행위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피는 방법 등으로 판단했어야 한다"고 했다. 법규부터 관행까지 면밀히 따져 의무없는 일에 대해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김 전 실장 등의 혐의사실 중 예술위 등 소속 직원들이 명단을 송부하고 사업 진행 상황을 보고한 내용은 이들이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등을 위반했는지에 심리가 미진해 범죄로 단정지을 수 없다고 봤다.

직권과 남용에 이어 의무없는 일이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직권남용죄는 더 어렵고 복잡한 죄가 돼 버렸다. 대법원이 직권 남용 기준을 세울 거라 예상해 촉각을 곤두세웠을 기존 재판들도 더 치열한 법리공방을 벌일 전망이다.

제93대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법무법인 공간)는 "이번 대법원 판례는 직무 범위와 남용 기준에 더해 '의무 없는 일' 여부까지 더 면밀히 심리해야 한다고 판시한다. 대법원은 무죄 취지는 아니라고 못 박았지만 결국 원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부분을 다시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라며 "검찰로서는 직권남용죄 기소는 물론 재판에서 혐의 입증 역시 더 심혈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재판이 전반적으로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달 30일 그동안 소부에서 맡았던 직권남용죄 사건에 대해 첫 판단을 내렸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 /남용희 기자

이번 대법원 판례는 소부가 아닌 전원합의체의 직권남용죄 첫 판단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이에 따라 이미 재판 중인 직권남용죄 사건들에도 영향을 줄지 이목이 쏠린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핵심 인물인 양승태(72·사법연수원 2기) 전 대법원장은 47개 혐의 중 무려 41개가 직권남용죄다. 재판기피 신청이 최종 기각됨에 따라 곧 1심 재판이 재개될 '사법농단 키맨' 임종헌(61·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역시 직권남용죄 유무죄가 재판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법원 판결로 이들의 직권남용 범죄 성립이 쉽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양 전 원장과 임 전 차장의 수많은 직권남용 공소사실은 "양 전 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행정처 심의관(평판사)들에게 진보 성향 판사 모임, 일부 재판과 관련한 내부 검토 보고서를 작성해 보고하게 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줄줄이 기소된 '사법농단' 사태 연루 법관들의 직권남용죄 공소사실 역시 부하 공무원에게 방안 모색과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민걸(58·17기)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측 역시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소모임 인사모를 와해하려는 목적으로 기획조정실 심의관들에게 대응방안을 검토한 뒤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는다.

대법원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혐의 내용 중 명단 작성과 보고서 송부에 재심리를 요청했다. 사법농단 사건 핵심 피고인들의 공소사실도 궤를 같이 한다. 대법 판결이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강신업 법무법인 하나 변호사는 "법관과 재판 관련 문건을 작성해 보고한 행위 등을 '의무없는 일인가'라고 묻는다면 범죄로 입증하기 상당히 난감해진다. 어쨌든 상급자 지시에 따라 업무와 관련된 작업을 한 것이니 대법원이 판시한 대로 직무수행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 규정을 위반했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라며 "공소사실 대부분이 문건 작성 지시와 보고 등인 사법농단 사태 관련 피고인들로서는 면죄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주장했다.

직권남용죄는 여전히 법리가 모호한 상태라 재판부 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법원이 기준 확립 필요성이 제기된 직무 권한과 남용 기준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삼현 숭실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대법원 판례가 나왔다고 재판부가 반드시 해당 판례를 인용하고 따르지는 않는다. 영미법계 국가와 달리 한국처럼 대륙법계 국가는 상급법원 판결의 효력이 약하기 때문"이라며 "특히 직권남용죄처럼 범죄 성부가 법규에 따라 명확히 갈리지 않는 혐의는 판사의 심증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해당 판례를 반영하고 안 하고는 각 재판부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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