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씨름하는 취준생부터 '코리안드림' 이주노동자까지
[더팩트ㅣ윤용민 기자] "겨울나무와/바람/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나무도 바람도/혼자가 아닌 게 된다//혼자는 아니다/누구도 혼자는 아니다/나도 아니다/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김남조의 '설일' 中 일부)
설날을 맞아 누군가는 들뜬 마음으로 귀성길에 오르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평소보다 더 서러운 마음을 부여잡고 쓸쓸함을 달래야 한다.
멀리 고향을 두고 온 새터민과 외국인 노동자, 시험을 코앞에 둔 공무원 수험생, 엄마 친구 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취업준비생 등이 바로 그들이다.
◆'외로운 청춘' 공시생 그리고 취준생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3일 오후, 공시생들의 땅 노량진 학원가는 평소보다 한산했다. 수험서를 파는 이른바 '복사집' 앞에서 마주친 유재영(31) 씨는 "설날이나 추석이 바깥에서는 큰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인강 진도를 따라가느라 미뤄둔 복습을 할 수 있는 기간일 뿐"이라며 가던 발길을 재촉했다.
연휴를 반납하고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공시생은 유 씨 외에도 많다.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이 불과 70여 일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공무원시험은 안정적인 미래를 위한 '마지막 동아줄'이다.
충주에서 상경했다고 밝힌 공시생 A(28·여) 씨는 "본가가 지방이긴 한데 솔직히 시간을 내면 갈 수 있다"면서도 "부모님이나 집안 친척 어른들을 보는게 조금 꺼려져 전화로만 안부 인사를 드리기로 했다"고 씁쓸해했다.
공시생보다 더 좌불안석인 청춘들도 적지 않다.
취업준비생 조영지(26·여) 씨는 이번 설 연휴기간에 학교 도서관으로 갈 예정이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그 시간에 취업준비를 하는게 더 낫다는 판단에서다.
조 씨는 "집을 나가주는 게 오히려 효도다. 괜히 엄마까지 친척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게 싫어서 도서관에 간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로스쿨 추가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김모(32) 씨에게도 이번 설은 달갑지 않다.
지난해 직장까지 그만 둔 그는 "초조함을 나누면 제곱배(?)가 되는 것 같다"며 "불안해하는 가족들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내년 설에는 로스쿨에서 민법을 공부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향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새터민·이주노동자
광주에 사는 새터민 류모(45·여) 씨는 해마다 설날이 되면 북녘에 두고 온 고향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러다 그 생각이 어머니에 닿으면 한없이 눈물만 흐른다.
그토록 바라던 한국 땅에 온지도 벌써 10년. 이제 새로운 가족까지 꾸렸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류 씨는 "설이든 추석이든 다 없었으면 좋겠다"며 "가고 싶은 곳에 못 가고, 봐야 할 사람을 못 보는데 명절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그러면서 "죽기 전에 제대로 된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코리안드림'의 꿈을 안고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도 설 연휴가 서럽기는 마찬가지다. 고향을 찾아 가족들을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고국에 대한 향수가 더욱 짙어지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에서 온 타리크(29)는 "엊그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 같은데 벌써 두 번째 맞는 설날"이라며 "아내가 보내 준 아이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웃음이 나다가 나중엔 눈물이 난다"고 했다.
머나먼 이억만리에서 고향의 설 풍경을 그리는 동포들도 있다.
국내 모 은행에서 근무하다 2015년 호주로 간 서수지(35·여) 씨도 설날이 되면 헛헛한 마음이 들기는 마찬가지다.
"매년 설날이면 교민들끼리 만나 한국 얘기를 해요. 각자 이유가 있어서 이 곳에 왔겠지만, 이럴 때 만나면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서로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뭔가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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