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바른말'하던 K판사, 왜 정신질환자로 몰렸나

K판사는 법원의 원세훈 전 국정원장 대선개입 사건 판결을 비판했다가 오랜 암흑기를 거쳤다. 사진은 2013년 8월 16일 국가정보원 댓글의혹 사건 등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출석한 원세훈 원장./이새롬 기자

재임용 심사 탈락할 뻔…당시 인사 담당자 "억울하다"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미증유의 대통령 탄핵을 불러왔던 '판도라의 상자', 국정농단 사태의 맨얼굴이 담긴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수첩에는 현직 판사 몇몇의 이름이 등장한다. 2014년 9월 22일자 '비위 법관의 직무배제 방안 강구 필요'라는 메모 옆 괄호 안에는 K 판사의 이름이 적혔다. 그는 당시 대선 개입 의혹으로 재판을 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심에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가 선고되자 "법치주의는 죽었다", "지록위마 판결"이라고 꼬집었다. 그해 11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정직 2개월 중징계였다.

원세훈 판결을 비판한 뒤 '양승태 사법부' 아래 보낸 3년여 시간은 K 판사에게 암흑기였다. 정기인사에서 서울지역 법원에 전보될 차례였으나 인천지방법원으로 배치됐다. 출근하려면 1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법원행정처가 선별하는 이른바 '물의야기 법관'에 매년 이름이 올라갔다. 이 명단은 대법원장 결재를 받아 정기인사 때마다 각급 법원장에게 공지돼 인사조치에 참고된다. 그뒤에도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는 K 판사가 요주의 인물로 여러번 오르내렸다. 이른바 '찍힌 판사'가 됐던 그는 동료 판사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내 고통을 호소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는 정신질환이 의심되는 것으로 오해받아 10년 마다 찾아오는 법관 재임용 심사에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정신적 문제는 연임 심사에서 큰 결격사유다. 그는 2016년 조울증을 앓아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유로 '물의야기 법관'으로 선별됐다. 그러나 K판사는 실제 정신질환도, 치료를 받은 적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법농단'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는 또다른 법정투쟁을 벌여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남용혐의 51회 공판에서도 K판사가 다시 거론됐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김연학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2015년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으로 일할 때 K판사가 조울증을 앓는다는 보고서를 썼던 인물이다. 검찰은 김연학 부장판사가 대법원 수뇌부의 '눈엣가시'였던 K판사를 인사조치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정신과 전문의에게 허위로 소견을 얻어 문건을 썼다고 주장한다.

김연학 부장판사는 자신을 '동료판사를 정신질환자로 몰고 간 사람'으로 여기는 건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K판사가 물의야기 법관으로 분류된 발단은 2015년 4월 24일 재판기일에 아무 연락없이 무단 결근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정신과 전문의에게 K 판사가 평소 조울증 치료제를 복용한다고 속여 이상 소견을 끌어낸 일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판 내내 신문에 짧게 답하던 김 부장판사는 이 대목에서는 오랜 시간을 쓰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검찰의 재반박 또한 거셌다. 검찰이 법정에서 제시한 법원행정처 보고서를 보면, K판사는 무단결근했다는 날 재판 시간 전인 오전 9시 30분 법원에 전화를 걸어 출근이 어렵다며 기일을 연기하겠다고 알렸다. 앞으로 1주일 연가를 사용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보고서는 당시 인사총괄심의관이었던 김연학 부장판사도 확인했다. '무단결근'과는 다른 정황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자료사진 /남용희 기자

김 부장판사가 정신과 전문의에게 받은 자문 내용을 놓고도 공방이 오갔다. 검찰이 주장하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 해보면 이렇다.

김 부장판사 : K판사가 동료들에게 단체 이메일을 보내고 재판기일 무단결근 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데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요.

의사 : 혹시 K 판사가 평소 복용하는 약은 없나요.

김 부장판사 : '리튬'(조울증 치료제)을 먹는 것으로 압니다.

의사 : 그럼 치료가 필요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김 부장판사는 이날 법정에서 자신이 전문의에게 K판사가 리튬을 먹는다고 알려준 적이 없다고 손을 저었다. 오히려 전문의가 "그러면 리튬을 먹었을 수도 있겠다"고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 문제가 언론에 보도된 뒤 전문의가 자신에게 연락해와 "기사에 나온 것처럼 검찰에서 진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속 이야기도 꺼냈다. 지방 법원 단독 판사 시절 평소 따랐던 선배 판사가 몇몇 이상 징후를 보인 뒤에 운명을 달리 했다. 비보를 접했을 때 김 부장판사는 법원행정처 인사총괄 제1심의관이었다. 사망한 선배 판사의 인사발령을 자신이 직접 처리하면서 큰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K판사 문제도 혹시나 하는 우려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전문의가 참고인 조사에서 김 부장판사에게 '리튬'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분명히 진술했고 본인이 조서를 확인했다고 못박았다. 또 사건의 본질은 '양승태 사법부' 눈밖에 난 한 판사가 정신질환 이력이 없는데도 공식 문건에 허위 기재돼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K판사의 '바른 말'은 정권과 대법원장이 바뀌어도 멈추지 않았다. 2017년 12월에는 대선 개입 혐의로 구속된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과 임관빈 전 국방부 정책실장이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자 "법관생활 19년째인데 구속적부심에서 이런 식으로 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질타했다. 지난해 2월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자 "이재용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지난 3월 법관 재임용 심사를 통과했으며 현재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부 재판장으로 기업 사건을 주로 심리한다.

leslie@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