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판사 이탄희의 양심에 불을 지핀 그날 밤

이탄희 변호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사법농단)에 맞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진은 지난 5월 2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 NPO 지원센터에서 사법농단은 왜 우리를 화나게 하는가를 주제로 강연하는 이 변호사. /뉴시스

양승태 전 원장 '사법농단' 제44회 공판…임효량 판사 증언대에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임효량 전 법원행정처 기획 제1심의관(현 수원지법 판사)과 이탄희 전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현 변호사)는 대학 선후배이자 사법연수원 34기 동기다. 평소 서로 "탄희야" "형"이라고 부른다.

사법부가 태풍의 눈에 들어가게 된 사법농단 사태는 2017년 2월 16일 시작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탄희 변호사가 법원행정처 기획 제2심의관으로 발령난 지 일주일 만에 사직서를 낸 날이다. 바로 전날 임효량 판사와 대화 후 대법원이 조직적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 한다는 정황을 확인한 이 변호사는 법복을 벗기로 결심했다. 사직서를 제출한 직후 이 사실을 안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중 한 명 역시 임 판사였다.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44회 공판에 증인으로 나선 임효량 판사는 지난 격랑의 기억을 법정에서 다시 꺼내놓았다.

임 판사는 2016년 3월 정식 부임을 앞둔 주말, 인사 차 법원행정처에 출근했다. 휴일인데도 기획조정실에는 김민수 기획 제1심의관(현 마산지법 창원지원 부장판사)이 있었다. 함께 법원행정처 차장실에 가자고 했다. 소문난 일벌레 임종헌 차장 역시 '월화수목금금금'을 채우던 중이었다.

임 차장은 임 판사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인사모 알죠?"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것도 몰라요?"

도대체 인사모가 뭐길래 처음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관심이 많은 걸까. 이 만남은 임 판사의 법관 인생에 닥칠 파란을 알리는 복선이었다.

인사모(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는 판사들의 전문연구조직인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핵심 소모임이다. 개혁적 성향의 판사들이 중심이 돼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에도 비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양 대법원장은 당시 "내 임기 내에 국제인권법연구회 문제를 정리하겠다"고 자주 이야기했다는 증언이 있다.

임 판사는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문건을 접하거나 작성에 일부 관여하게 된다. '전문분야연구회 구조개편 방안', '전문분야연구회 개선방안', '전문분야연구회 구조개편 방안 검토', '인사모 관련 대응방안 검토' 등이다. 이름은 비슷비슷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타깃은국제인권법연구회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외비'가 새겨진 일부 보고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에게도 보고됐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날 법정에서 검사의 신문에 임 판사는 말했다. "솔직히 문건 내용은 본지 오래 돼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문건을) 읽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난다."

이듬해인 2017년 기획 제1심의관으로 전보되면서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 문제는 임 판사의 업무가 됐다. 동시에 2월 두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안양지원 영장 전담 판사로 일하던 이탄희 변호사가 2월 9일 법원행정처에 부임한다. 임 판사와 기획조정실 제1,2심의관으로 손발을 맞추게 됐다. 2월 13일에는 법원행정처가 법원 전산망인 코트넷에 '중복가입 탈퇴 공지'를 게시했다.

법원 예규상 판사는 전문분야 연구회에 중복가입할 수 없고 국회와 감사원 등에서 예산 낭비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으니 중복 가입 상태인 판사는 한 연구회만 선택하라는 내용이었다. 만약 스스로 정리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가입한 연구회 회원 자격만 인정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임 판사는 이 공지글이 올라가기 하루 전 미리 알았다. 문안을 작성한 김민수 판사에게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누가 봐도 국제인권법연구회 맞춤형 정책이고 '금반언의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거칠게 말해 '한 입으로 두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의 법률용어다. 1년 전 법원행정처 전문분야 연구회 지원비용을 두배가량 증액한 예산이 국회 통과됐고 아무런 지적을 받은 적도 없었다. 예산 문제 때문에 이런 조치를 취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었다.

판사들이 들끓기 시작할 즈음 임 판사는 이탄희 변호사와 늦은 시각까지 서초동 대법원 청사 법원행정처 기조실에서 이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 자리에서 임 판사의 입에서는 충격적인 말들이 나왔다. 중복가입 탈퇴 공지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노린 조치이며, 법원 차원에서 정책으로서 결정됐다는 설명이었다. "'블랙리스트 프레임'에 들어가면 끝장"이라는 말도 나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내 임기 내 인권법연구회를 정리하겠다고 의지를 보였다는 증언이 많다. 사진은 지난 1월 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대국민 입장발표를 하는 양승태 대법원장./ 남윤호 기자

임 판사는 이날 '블랙리스트 프레임'의 의미를 놓고 검사와 변호인 측 모두에게 신문을 받았다.

"중복가입 탈퇴 조치는 외관은 법원 예규를 지킨다는 거지만 실질적으로는 불이익을 주는 거다. 이 조치가 수면 위로 나오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선을 넘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실제 명단이 있는 건 아니지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비슷한 프레임으로 갈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결국 여러 경로를 통해 '사법농단'의 심증을 굳혀온 이탄희 변호사는 임효량 판사와 만난 바로 다음날 "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임 판사도 그의 마음을 돌려놓지 못 했다. 법정에서 과거의 과정이 다시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임종헌 차장은 곧 승진해 법원행정처에서 나갈 테니 그 뒤는 심의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기조실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탄희 판사는 법원행정처에 오지 않았으면 사표를 쓸일이 없었다. 자신의 인생 계획에 있던 게 아니라 외부 환경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원치않는 조건이 생겨서 사표를 내야했다. 슬프고 안타까웠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사직서는 반려됐고 이 변호사는 일단 안양지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의 보도로 11일 동안 벌어진 사태의 일각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판사가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사법농단 사태'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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