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상대 손해배상 소송 3년 만에 '첫 변론기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역사의 산 증인 이용수입니다. 일본은 당당하면 재판에 나와라. 일본은 방해하지 말고 협조하라."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첫 재판이 열렸다. 일본 정부에서 주권면칙을 내세워 재판을 거부해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수차례 지연된 끝에 잡힌 기일이었다. 원고 측 당사자 이용수 할머니는 재판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은 물론 법정에도 직접 출석해 "일본이 당당하다면 재판에 나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1000일 만에 첫 변론기일이 열리기까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건 2016년 12월의 일이다. 2015년 12월 일본 정부는 피해자에 대한 법적 배상없이 도의적 책임만 진다는 내용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체결한 지 꼭 1년 째 되는 시기였다. 2011년 피해자들이 "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한일정부가 달리 해석하는데 한국 정부가 해결에 나서지 않는 건 위헌"이라며 제기한 헌법소원이 위헌으로 결정난 것에 대한 후속조치였다.
2016년 하반기부터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며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의 대법원 판결을 지연시킨 정황이 드러났다. 이듬해 사태의 핵심 인물 박근혜(68) 전 대통령 탄핵을 시작으로, 사법부 차원에서 박근혜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조작한 혐의로 법관들도 줄줄이 기소됐다. 그럼에도 피해자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소송은 좀 처럼 진행되지 못했다. 일본 정부가 "국가는 외국 재판소에 강제로 피고가 될 수 없다"는 주권면제 원칙을 내세워 재판을 거부해서다.
주권면제 원칙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깨진 바 있다.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끌려가 노역을 한 자국민이 독일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독일의 배상을 확정 판결했다. 독일의 불복으로 바통을 이어 받은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이탈리아 대법원 판결을 유지했다. 이외에도 1926년 제한적 주권면제론이 처음으로 대두된 브뤼셀 협약을 시작으로 △국가면제에 관한 유럽협약(1972) △국가 및 그 재산권 면제에 관한 국제연합 협약 등에 주권면제 원칙(2004)에 국가 면제의 범위는 제한될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일본 측 주장은 국제 판례와 협약에 비춰봤을 때 재판을 거부할 사유로 부족하다.
일본 정부가 주권면제 원칙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도 한국 법정에 피고로 세우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또 있었다. 소장이 피고발인 일본 측에 전달돼야 했지만 번번이 송달이 이뤄지지 않았다. 엄연한 소송법상 절차라 생략할 수 없는 상황에 비협조적인 일본 측 태도가 겹쳐 기약없이 3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 중 일부는 고인이 되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다.
◆'공시송달'로 열린 첫 변론기일…재판부에 큰절도
지난 5월 한국 법원은 사건을 법원 게시판에 공지하고 일본 정부에 소송 서류가 도달한 것으로 판단해 '공시송달'을 하면서 이날 재판이 처음 열리게 됐다. 송달 장소를 알 수 없거나 외국으로 촉탁송달이 불가한 경우 택하는 소송법상 송달법 중 하나로, 공시송달을 게시한 다음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공시송달이 게시된 후 11월 13일 오후 5시로 첫 변론기일이 지정됐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유석동 부장판사)는 고 곽예남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첫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유석동 부장판사는 "우리 법원은 피고 일본국 측에 대해 지난 5월 공시송달을 게시했고, 피고인 일본 정부 역시 소송에 대해 인식한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합법적으로 진행되는 재판이었지만 피고 일본 정부 측은 출석하지 않았다. 재판을 약 1시간 30분 앞둔 시점 인근에 위치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 일본 외신기자들이 드문드문 보였던 것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원고 측 이용수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연달아 열린 기자회견과 재판에 모두 출석했다. 세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재판에 나와 사죄하고 합당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밝혔다. 이용수 할머니는 기자회견에서 "역사의 산 증인 이용수다. 일본은 당당하다면 재판에 나오라"며 "우리의 역사는 유네스코에 등재돼야 한다. 일본은 방해하지 말고 협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지만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던 이용수 할머니지만 3년 만에 열린 첫 변론기일에서 재판부를 마주하자 결국 눈물을 쏟았다. 유 부장판사의 만류에도 재판부를 향해 큰 절을 하고 무릎을 꿇은 이용수 할머니는 "저는 14살에 일본 부대로 끌려 가 전기고문을 당했다. 저희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본 대사관 앞에서 공식적 사죄와 법적 배상을 90살 넘도록 촉구했다. 일본이 당당하다면 이 재판에 나와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은 주권면제라는 장벽이 있다. 원고 측 대리인단은 설득력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변호인은 고인이 된 피해자도 있는 만큼 축적된 진술을 연구한 전문가를 증인으로 신청하고, 주권면제에 예외를 둔 이탈리아 대법원 판례를 적극 활용해 재판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추후 재판은 2020년 2월 5일 오후 2시로, 일본 측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서증조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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