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문건 반출' 유해용 공판…"임종헌 또 부르자"는 검찰과 갈등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재판장님, 너무 친절하십니다. 재판을 30년 들어갔지만 이렇게 얘기하시는 분은 처음 뵀습니다."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전 법관이 피고석에 선 법정에서 변호인이 부장판사에게 건넨 말이다. 검찰이 신청한 증인 및 사실조회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이의를 이어가자 변호인은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박남천 부장판사)는 11일 오전 10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와 공무상비밀누설, 절도 혐의 등으로 기소된 유해용(53)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 사건 공판기일을 열었다.
재판부는 애초 이날 공판에서 피고인 신문 후 변론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검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검찰은 지난 7월 이 사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다시 부르고자 했다. 또 대법원 문건을 유출한 사건인 만큼 대법원 재판연구실 측에 사실조회를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추가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예비적 공소사실을 추가하겠다고 알렸다.
임 전 차장은 유 전 연구관과 박근혜(67) 전 대통령 측근 김영재·박채윤 부부 특허등록 무효 소송 관련 문건을 청와대 측에 누설한 혐의를 받는 인물이다. 검찰에 따르면 임 전 차장은 청와대에 해당 문건을 전달한 사실 진술을 번복했다. 7월 유 전 연구관의 재판 증인석에 섰을 당시에도 임 전 차장은 대부분의 질문에 증언을 거부했다. 검찰은 이미 증인신문을 진행했지만 사건 관여도에 비해 신빙성 있는 진술을 하지 않았다며 증인채택을 요청했다. 진술이 불명확한 부분을 추가 심리하는 것으로, 기존에 이뤄진 신문과 중복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공판준비기일에서 사건 쟁점과 증거조사 계획도 정한 후 신문한 증인"이라며 "당시 신문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해서 다시 증인신문을 진행하면 절차 지연 우려가 있다"고 검찰 측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에 대한 사실조회 신청 역시 "이 사건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항소에 상고를 거쳐 대법원에서 심리할 수도 있는데 대법원의 견해를 듣는 건 죄종 결과를 알고서 (검찰이) 재판에 임하겠다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검찰이 추가 심리를 할 것으로 예단해 피고인 신문을 준비하지 않은 사실을 안 재판부는 깊은 한숨을 쉬기도 했다.
대부분의 요청이 수용되지 않은 검찰의 표정도 매우 어두웠다. 검찰은 재판부에 기각 결정 사유를 더 설명해 달라며 "변호인 측 신청은 다 받아들여 주주셨다"고 날선 발언을 던지기도 했다. 지켜보던 변호인도 참지 않았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재판장님, 너무 친절하십니다. 재판을 30년 했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얘기해주시는 분은 처음 뵀습니다. 변호인은 '기각한다' 한마디만 들으면 끝나는 일인데 검찰께서 이렇게 거듭 이야기하시는 건 변론을 지연하는 것입니다. 이 재판이 8개월에 접어들었는데 검찰이 증거신청을 추가로 몇 번이나 한 건지 셀 수도 없습니다." (변호인)
"공판 진행 경과에 따라 변동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저희로서는 시의적절하게 필요한 증거자료가 있다고 생각해서 추가증거를 신청한 겁니다." (검찰)
'친절한' 재판장도 양측의 공방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재판부는 검찰과 변호인의 말을 자르며 결정을 내렸다. 검찰 측에서 요청한 임 전 차장의 증인신문을 포함한 증거 신청은 모두 기각했다. 검찰이 공소장을 변경하도록 2주의 시간을 주면서도 "검찰 측이 피고인 신문을 준비하지 못해 오늘은 예정된 증인신문과 서증조사만 진행하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이날 재판에는 2017년 2월~2018년 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한 정 모 씨도 증인석에 섰다. 정 씨는 사건의 핵심인 대법원 재판 연구 보고서 보안성에 대해 "보안을 위한 유의사항보다 작성 방법에 더 신경 썼다",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정 씨였지만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뚜렷한 증언은 나오지 않았다.
유 전 연구관의 공판은 11월 27일 속행될 예정이다. 검찰은 추후 공판기일 전까지 공소장 변경 신청서를 제출하고, 해당 기일에 허가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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