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41회 공판…고영한 전 처장의 항변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장우성 기자] "재판장님. 변호인은 지금 피고인의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 주장으로 (증인을) 유도신문 하고 있습니다."
가을답지 않게 나른한 날씨. 오전부터 완만한 파고로 이어지던 재판이었다. 검찰 쪽이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변호인의 신문 도중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41회 공판 법정에서다.
그러나 재판부는 검찰의 이의를 인정하지 않고 재판을 속행시켰다. 이에 힘입은 고영한 전 처장 쪽은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홍승면 서울고법 부장판사(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의 잠든 기억을 깨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시간은 2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2017년 1월 고영한 당시 법원행정처장 주재로 열린 행정처 실장 회의. 양승태 대법원장이 "내 임기 내 해결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보인 '중복 가입 해소 조치'가 논의되던 자리였다. 이 조치는 양 대법원장에 비판적인 소장판사들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구회 소모임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무력화를 위한 방안이었다. 판사들의 연구모임 중복가입을 금지하기 위해 최초에 가입한 연구모임 외에는 모두 탈퇴 조치한다는 내용이다. 이러면 가장 늦게 생긴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부임한 이탄희 변호사(당시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가 이에 항의해 사의를 밝히면서 사법농단 사태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날 재판에서 고영한 전 처장 쪽은 당시 중복 가입 해소 조치를 우려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홍승면 부장판사에게 끈질지게 질문을 던졌다.
이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그날 회의는 이렇게 진행됐다. 고영한 처장은 중복 가입 해소 조치 시행을 놓고 실장들의 의견을 물었다.
홍승면 당시 사법지원실장이 입을 열었다. "(중복 가입 해소 조치를 강행하면) 판사님들이 많이 싫어할 것 같습니다. 탄압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임종헌 차장과 이민걸 기획조정실장은 강경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중복가입금지와 설립 목적 및 활동범위에 관한 예규를 위반했으며 국회와 감사원에서 예산 지적도 받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서 피고인(고영한 처장)이 '무슨 논리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지 않았습니까."(고영한 측 변호인)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홍승면)
"피고인은 정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 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가 끝나는 3월 이후에 하자는 말도 했다는데요."(변호인)
"그런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닌데...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홍승면)
고영한 전 처장 쪽은 욕심만큼 홍승면 부장판사의 증언을 이끌어내지 못 했다. 다만 홍 부장판사는 "처장님이 많이 망설인 건 맞다. 실장님들은 대체로 (중복 가입 해소 조치를) 찬성하는 분위기 였는데 처장님의 회의 마지막 멘트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해 5월 고영한 처장의 임기가 끝나면서 환송 만찬이 열렸다. 이미 중복 가입 해소 조치가 언론 보도로 폭로되면서 '사법농단 사태'가 본격화한 뒤였다. 이 자리에는 홍승면 부장판사와 당시 서울고등법원으로 복귀한 이민걸 실장 등이 참석했다.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은 이인복 전 대법관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사표를 낸 임종헌 차장은 자리에 없었다.
고영한 처장 쪽에 따르면 이민걸 실장은 이날 만찬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장님 말씀을 들었으면 이런 사태가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임종헌 차장이 주장하는 것마다 모두 하지 말자고 해서 임 차장의 면이 너무 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 중 중복 가입 해소 조치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침착하고 또박또박한 어조의 홍승면 부장판사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전후 멘트는 생각이 안 나는데 (이민걸 실장이) 죄송하다는 말씀은 했다"고 증언했다. 이 실장의 '임종헌 면 세워주기' 해명 주장에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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