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 인종, 국적, 그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차별되어서는 안 되며, 아동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져야 한다'고 명시한다. 이는 어떤 상황에 있는 아동이더라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부모가 형사적 책임을 지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수감생활을 징벌로만 인식하는 국내 정서에서는 수용자 자녀의 권리에는 무감각하기 쉽다. <더팩트>는 연 5만명가량으로 추산되는 수용자 자녀들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3회에 걸쳐 살펴봤다. 첫번째 순서는 두 아들을 쇠창살 밖에 두고 2년간 가슴을 태우며 수형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고백이다.<편집자주>
초등학생 두 아들 두고 교도소 2년…출소 후 열어본 메일함에 눈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지난 5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경찰청장과 대법원장, 법무부 장관에게 모든 형사사법 단계에서 수용자 자녀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자녀와 함께 있는 현장에서 피의자를 체포·구속 시 아동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면 양육이 필요한 아동이 있는지 등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라는 내용이다. 반응은 차가웠다. 인권위 권고를 보도한 기사에는 "피해자 자녀도 그렇게 생각해 줘라", "뜬구름만 잡는 한심한 작자들", "가증스럽게 '쓰레기'가 인권을 들먹인다" 등 날선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인권위의 '수용자 자녀 인권상황 실태조사'(2017)에 따르면 수용자 중 미성년자 자녀가 있는 비율은 36%에 달한다. 자녀의 연령대별로 분석하면 2016년 기준으로 고등학교 이상 30.5%, 초등학교 연령 29%로 가장 많았고 6세 이하 미취학 아동도 24.6%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구속 특성상 성인의 보호와 양육이 필수적인 아동이 어느 날 갑자기 부모와 분리되는 만큼 국가 차원의 인권 보호가 절실하다.
교도소 수감 경험이 있는 연년생 두 아들의 아버지는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바깥에 아이를 두고 오며 가장 먼저 든 걱정이 생계 문제라고 털어놨다. 조부모가 돌보고 있는 두 아이의 학원비를 어떻게 충당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아이를 보고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폐쇄적인 접견환경에 그리움마저 삭힐 수밖에 없었다.
◆"아빠 다녀올게" 인사가 마지막이 됐다
10여년 전 교도소에서 2년을 보낸 우동희(48·가명) 씨는 미군기지로 유명한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는 '양색시'(미군 기지촌에서 근무하는 술집 여성 종업원)의 이야기는 어린 동희 씨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군의 손에 비참하게 목숨을 잃은 여성의 이야기가 하루 건너 전해졌다. 그때 다짐했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아 아빠가 된다면, 좋은 곳에서 좋은 것만 보고 자라게 해야지."
동희씨는 또래보다 일찍 결혼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연년생 아들 둘을 뒀다. 아내와 별거에 들어간 후에도 두 아들을 보살폈다. 본가에서 부모, 두 아들과 살아가던 그는 어느 날 시내에 외출했다가 체포됐다. 아침에 나오며 두 아이에게 "아빠 다녀올게"라고 한 인사가 마지막이 됐다. 동희씨는 재판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아이들은 아직 초등학생으로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몰랐다. 두 아이를 생각하면 눈앞이 막막했지만 가장 먼저 든 걱정은 한창 공부할 나이의 아이를 위한 학원비였다. 동희씨는 나이 든 부모와 두 아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었다. 늙은 부모님이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지, 근근이 먹고 살더라도 아이들의 학원비는 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멀게만 느껴지는 출소 후에도 전과자 딱지를 단 이상 예전처럼 돈을 벌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아이들의 학업 때문에 근심에 빠진 그에게 교도관들이 수용자 자녀를 찾아다니며 과외를 해주는 대학생 봉사활동에 신청하라는 서류를 내밀었다. 동희씨가 있던 방에도 자식이 있는 수용자가 여럿이었으나 서류에 이름을 적는 이는 드물었다. 안 그래도 "그 집 아들 요즘 왜이렇게 안 보여? 지방에 일하러 갔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라는 시선을 던지는 이웃이 많았다. 전문 인력도 아닌 대학생이 들락날락하면 '죄수 아들'이라는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사랑하는 내 아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컸지만 동희씨는 2년의 옥살이를 하며 아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들이 그립지 않았냐는 질문에 동희씨는 "정말, 말도 못해요. 그 마음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에요"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그래도 만나기 싫었다. 동희씨가 어린 시절 한 다짐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과 기자가 오가고 시신에 걸쳐진 화려한 옷가지만큼 강렬한 색깔의 붉은 피가 흩뿌려진 사건현장을 보고 자란 동희씨는 아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 철창 너머 수의를 입은 아빠의 모습은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교도소를 보는 건 죄지은 나 하나면 충분하지. 우리 아이들이 이런 걸 볼 필요는 없잖아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는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오후 4시면 끝나는 면회시간에 공간도 협소한 접견실 앞은 늘 대기줄이 길었다. 대기줄에는 욕설을 내뱉으며 울부짖는 가족, 문신이 가득한 몸으로 두목을 접견하러 온 조폭들이 가득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느니 차라리 사무치는 그리움을 참는게 더 나았다. 동희씨의 부모님은 '부모된 마음'으로 아들을 보러 자주 왔지만, 반대로 동희씨는 '부모된 마음'으로 아들을 보고싶지 않았다.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동희씨는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이 손자들에게 동희씨의 수감사실을 알리지 않고 멀리 일하러 갔다고 둘러댄 터라 말을 맞춰야 했다. 키가 한뼘이나 자란 아이들도 2년만에 나타난 아빠를 반길 뿐 별다른 질문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던 중 동희씨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 두 아들에게 어린이용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준 적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들어간 메일함에는 동희씨가 수감됐을 당시 두 아들이 보낸 이메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이들은 뭔가 눈치챈 듯 "아빠, 많이 보고 싶어. 언제 와?", "아빠, 몇 밤 자면 또 볼 수 있는 거야?", "아빠, 나 너무 심심해. 빨리 와서 놀아줘"라는 내용이 담겼다. 동희씨는 컴퓨터 앞에 엎드려 한참을 엉엉 울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동희씨의 두 아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두 아들이 고등학생이 됐을 때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수감사실을 고백했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한 죄책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사과도 빼놓지 않았다. 동희씨가 "아빠가 많이 미안해"라고 말하자 두 아들은 덤덤히 대답했다.
"아빠, 사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어. 아빠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남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닌데 우린 정말 괜찮아."
이제 동희씨의 두 아들은 20대 청년이 됐다. 동희씨가 일하는 직장에 종종 찾아와 일손을 돕기도 한다. 동희씨보다 덩치도 커진 두 아들이지만 여전히 품 안의 자식이다. 그리고 마음 한 켠으로 생각한다. 한 순간 실수로 피붙이와 생이별해야 하는 수많은 아빠 엄마들을. 그리고 죄없는 아이들을. 크게 바라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그 아이들만이라도 따뜻하게 품어줄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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