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록 유출한 판사 첫 공판 "검찰 기소 부당"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송주원 기자] 19일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기소된 성창호(47) 서울동부지방법원 부장판사 등 3명의 첫 공판기일이 열렸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전·현직 법관 중 비교적 늦게 정식 재판 절차에 돌입한 셈이다. 앞서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양승태(71)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60)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선례를 본 탓일까. 처음으로 피고석에 앉은 현직 부장판사 3명은 당당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혐의를 전면 부인함은 물론 법원에서 법원행정처로 수사기록을 전달한 것이 비밀 누설이라면 영장실질심사 때마다 법원에 수사 자료를 제출하는 검찰 역시 다를 바 없다고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변호인단의 모두진술이 끝나고 3명의 피고인에게 스스로 변론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적극적이었다. 보통 피고인은 그저 변호인의 입장과 같다며 말을 아끼기도 하고 선고 직전 최후변론에 말하겠다며 거부하기도 한다. 어렵게 입을 뗀 피고인이라도 요점을 말하기에 앞서 엄숙한 분위기와 피고인이란 신분에 눌린 탓인지 "죄송하다"는 말부터 튀어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신광렬(54)·조의연(53)·성 판사는 각각 "형사수석부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임무만 했다", "법리적으로 보나 사실관계로 보나 죄가 될 수 없는 사항이다", "이 사건 기소내용을 전혀 인정할 수 없다"고 당당히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19일 오전 신 판사 등 3명의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피고인 3명은 직업을 묻는 재판부의 질문에 모두 '판사'라고 대답했다. 5월 대법원에 따르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아 검찰에게 비위통보를 받은 현직 판사 66명 중 10명에게 징계를 청구했다. 징계 명단에는 신·조·성 판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재판에서는 검찰의 공소사실 설명과 각 피고인 측의 모두진술이 진행됐다. 준비기일 내내 검찰과 변호인 간 의견을 좁히지 못했던 '공소장 일본주의 논란'을 결론지었다.
검찰은 "신 판사는 지난 2016년 임 전 차장의 지시를 받아 '정운호 게이트'에 연루된 법관의 영장 청구서와 수사기록을 제공했다"며 "신 판사는 당시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하던 영장전담 성 판사, 조 판사로부터 9개의 관련 문건과 수사보고서 사본을 보고받았다"고 설명했다. 신 판사는 영장전담 재판부를 통해 검찰 수사상황과 향후 계획을 수집해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를 받는다. 신 판사에게 해당 내용의 자료를 수집해 보고한 성·조 판사 역시 같은 혐의를 받는다.
다음으로 피고인 3명의 모두진술이 이어졌다. 임 전 차장에게 직접 법원 내부 문건을 전달한 신 판사 측이 먼저 바통을 쥐었다. 이 사건에서 법원행정처와 법원 사이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한 주요한 인물인만큼 신 판사 측 변호인은 이날 오전 모두진술을 한 변호인 중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해 자신의 의뢰인을 비호했다.
신 판사 측은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신 판사를 포함해 이들 3명이 받는 형법 제127조 공무상비밀누설죄는 법관과 같은 공무원이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 알려지면 안되는 직무상 비밀을 말하면 안된다는 조항이다. 변호인은 해당 조항 중 "일반적 입장에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고 상당한 이익이 되는 사실"에 집중했다. 변호인은 "당시 언론에서는 '정운호 게이트' 사건과 관련된 보도가 실시간으로 쏟아졌다. 신 판사가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내용을 비밀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서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것은 사법행정상 목적의 내부 보고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또 변호인은 당시 신 판사가 재직한 중앙지법과 법원행정처는 사실상 같은 조직이므로 비밀 누설이라는 혐의 적용은 애초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법원행정처는 사법연수원과 법원직 공무원 등 사법부 내 다양한 사법 행정을 맡고 있다"며 "법원행정처는 법원의 내부기관이지 별개의 외부 기관으로 볼 수 없다. (임 전 차장과 신 판사 사이에 오간 보고는) 절대 비밀 누설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따지면 검찰 역시 영장 청구 과정에서 법원에 수사 자료를 보내는 것도 비밀 누설이냐. 검찰부터 근거를 대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이 주장한 공소사실 중 임 전 차장이 '정운호 게이트'에 연루된 법관 수사에 대응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신 판사에게 자료 수집을 지시했다는 내용에 대해서도 "해당 공소사실을 밝혀낼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고 말했다.
조 판사 측은 모두진술과 함께 '혐의 전면 부인'의 바통도 함께 이어받았다. 조 판사 측 변호인 역시 "조 판사가 자료를 보고한 상대방이 직무와 관련없는 제3자가 아니었다. 직무에 관한 권한이 있는 자에게 정보를 알려준 것은 비밀누설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해당 자료에 기재된 내용은 이미 외부에 널리 알려진 사건이었고 조 판사의 행위로 수사 등 국가기능을 위협한 바도 없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모두진술을 맡은 성창호 판사 측 변호인은 검찰의 기소를 두고 '사상 초유'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성 판사가 받는 혐의를 역시 전면 부인했다. 변호인은 "이 사건에서 검찰의 기소는 현직 법관의 영장 처리과정을 문제 삼아 기소한 초유의 사건"이라며 "영장전담판사가 직무에 관한 내용을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것을 두고 법원행정처의 부당한 요구에 순응한 법관이라는 구도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변호인단의 열띤 비호를 받은 피고인들도 입을 열 차례였다. 공소사실에 대해 직접 변론할 기회를 주겠다는 재판부의 배려에 법대에서 내려온 세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진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당시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한 형사수석부장판사로서 직무상 마땅히 해야할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이 점만을 강조하겠습니다." (신광렬 판사)
"법리적인 측면은 물론 사실관계에서 바라봐도 (검찰의 공소사실은) 죄가 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조의연 판사)
"이 사건 기소 내용은 전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재판 과정에서 기소 과정의 부당함을 밝혀 나가겠습니다." (성창호 판사)
한편 이날 재판은 변호인단이 검찰의 공소장을 두고 제기한 '공소장 일본주의' 논란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 속에 잡힌 기일이었다. 앞서 검찰은 변호인단의 이의를 받아 들여 일부 내용을 2회 수정했다. 그러나 직전 공판준비기일에서도 변호인단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지난 달 15일 변호인단은 "검찰이 공소장을 변경하며 피고인의 범행으로 수사기능에 이어 법원 재판기능까지 방해를 받았다고 기재했는데 두 기능은 명백히 다른 기능"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재판에서도 조 판사 측 변호인은 "검찰 공소장이 여전히 문제가 있는 상황임에도 공소장 변경 허가 신청서가 이날까지도 제출되지 않았다"며 "공소사실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 피고인이 받는 의혹을 밝혀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더 이상 공소장으로 다투지 않겠다고 밝혔다. 변호인은 "법리적으로도 사실관계에서도 무죄를 확신하기 때문에 더 문제삼지는 않겠다"며 "다만 여사기재(공소장에 공소사실과 관련없이 기재된 내용)로 재판부가 피고인들에 대해 어떤 예단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재판부 역시 6월 2차 준비기일에서 공소장을 읽으며 "(검찰의) 속마음을 썼냐"고 강도높게 지적한 바 있었다. 그러나 앞서 사법농단으로 심판대에 오른 법관들이 재판 지연을 위해 공소장 일본주의를 들먹인다고 비판받은 선례를 따르지 않으려는 듯, 본 재판을 담당한 형사합의23부는 신속한 재판 진행을 수 차례 다짐했었다. 재판부는 성·조 판사 측도 공소장 일본주의 주장을 철회하자 수 개월간 끌어왔던 논란을 일단락했다. 재판부는 "검찰은 2차례 공소장을 변경했지만 일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피고인 측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재판부가 공소사실을 기각하는 것은 직권상 적절치 못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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