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는 없다①] 에이즈 걸리면 죽는다고? 내일모레 환갑이에요

지난 2018년 10월 개봉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전설적인 록 밴드 퀸 천재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그렸다.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 에이즈 합병증으로 인한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했다. /보헤미안 랩소디 스틸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국내에서 관객 994만8386명을 동원했다. 인구 5명에 1명 꼴이다. 이 영화로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는 사후 28년 만에 한국 땅에서 '부활'했다. 특히 에이즈(AIDS, 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무너져가던 그의 마지막 무대, '라이브 에이드'를 재현한 공연 신은 감동의 최절정을 선물했다. 그러나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우리는 다시 현실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 세계에 프레디 머큐리는 없다. 우리 사회는 1985년 국내 첫 에이즈 감염이 확인된 이후 30년이 넘도록 편견과 왜곡을 해소하지 못 했다. 감염인 단체 '러브포원'의 'HIV/AIDS에 대한 20대~30대 HIV 감염인의 인식 조사 보고서'(2018)에 따르면 감염보다 에이즈에 대한 비난이 더 힘들다고 답한 응답자는 87.9%에 달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비극에는 슬퍼하지만 에이즈는 혐오하는 사회. <더팩트>는 오늘도 편견의 강을 거슬러 헤엄쳐야 하는 또다른 프레디들을 2회에 걸쳐 찾아간다.<편집자주>

'보헤미안 랩소디'는 열광, 에이즈는 혐오…모순과 싸워온 네 사람 이야기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또 다른 프레디들을 만나기 전에 챙겨두면 좋을 상식 몇가지.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와 에이즈(AIDS)는 구별된다. HIV 바이러스가 제대로 통제되지 않아 인체 면역체계를 파괴해 합병증이 일어나면 에이즈 발병에 이른다. 하지만 의학의 발달로 당뇨병, 고혈압처럼 관리가능한 질병이 된 지 오래다. HIV 감염 단계든, 에이즈 발병 단계든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으면 문제없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에이즈 공포'의 근원인 감염력도 침소봉대됐다. 전혀 치료를 받지않은 HIV 감염인과 피임기구 없이 성관계를 갖거나, 그에게서 많은 양의 혈액을 주사받지 않는다면 감염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일부러 감염시키거나 감염되려고 해도 쉽지않다.

<더팩트>는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 인근에서 HIV 감염인 4명과 인터뷰했다. 아무리 뜯어봐도 차이를 찾아낼수 없는 평범한 이웃이었다. 감염인이라고 하면 창백하고 병약한 안색을 연상하기 쉽지만 이는 허황된 편견의 결과라는 걸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글 싣는 순서대로 20대, 30대, 40대, 50대인 이들은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앤디, 쿤, 진달래, 김문수라는 닉네임으로 대신한다. 이들이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희망을 사수해온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들어보자.

HIV/에이즈 감염인 3명이 7월 30일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에이즈 예방과 감염인의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스티커가 인터뷰 장소 벽에 부착돼 있다. /이새롬 기자

#아버지도_모르는_나의_이야기 #아직은_때가_아니야

내 이름은 앤디(가명). 3년 전의 일이다. 어린 아이들만 걸리는 줄 알았던 아토피 피부염에 걸렸다. 처음에는 가렵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미친 듯이 따가웠다. 피부 트러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체중 감소가 만병의 전조증상이라던데,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병 앞에 장사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찾았다. 피부에 올라온 아토피와 체중 추이를 들은 의사는 HIV 바이러스 검사를 권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감염됐단다. 면역수치가 0~3 수준(보통 500~800)까지 떨어졌다. 합병증까지 겹쳤다. 에이즈, 그것이 내 병명이었다. 아토피와 체중 감소는 HIV의 활동 때문에 면역력이 곤두박질 친 결과였다. 원래 암 환자도 병명을 알고 나면 아프다고 하지 않은가. 그때부터 내 삶은 지옥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때만 생각하면 "정말 죽다 살아났지"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나의 병은 지금도 어머니만 알고 계신다. 에이즈란 공포의 질병, 죽음을 부르는 병이었을 시대를 살아온 엄마다. 치료기술이 비약의 발전을 이룬 지금, 엄마를 안심시키는 의사의 말솜씨는 화려했다. 그러나 아들의 에이즈 발병을 안 어머니의 마음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우리 모자는 머리를 맞대고 다행이라는 말을 읊조렸다. 면역수치가 나쁜 것 치고는 비교적 양호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면역수치가 높은데 시력을 잃고 결핵에 걸려 수십 가지의 약을 털어 넣는 환자도 있다.

에이즈 진단을 받고 3년차를 맞았다. 벌겋게 피부를 감쌌던 아토피도 나아졌다. 진단을 받은 후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자 합병증은 사라졌다. 상대에게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감염력도 최저를 찍었다. 차라리 진작 발견해서 성가신 아토피도 앓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유난히 생각이 많았던 어느 날, 어머니께 "이제 아버지와 다른 가족에게 알리는 것이 어떨까"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내게도 자신감이 생겼다. 에이즈는 그렇게 흉측한 병이 아니야. 나도 이겨냈어. 하지만 어머니는 말씀 하신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HIV감염선수_퇴출_동네방네_소문낸_K리그_역시_대~한민국

얼마 전, 프로축구구단 대전시티즌이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 지 하루 만에 HIV 보균자라는 이유로 퇴출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냥 내보냈어도 문제인데, HIV‧에이즈 인권 사각지대인 한국에서조차 법으로 금지하는 감염 사실 공표를 당당하게 보도자료로 뿌렸단다. 내가 HIV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수많은 지인들이 괜찮냐고 물어본다. 그들의 배려에 감사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그냥 '대한민국'이 '대한민국'했네. 이 나라에 뭘 바랄까 싶다.

내 이름은 쿤이라고 해둘게. 6년 전 20대 초반이었던 내 취미는 주기적으로 하는 헌혈이었다. 사람들은 "피 뽑아서 남을 도와주더니, 참 훌륭한 청년이네"라고 칭찬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지만, 사실 피를 뽑고 나오는 길에 쥐어주는 공짜 영화표의 재미가 쏠쏠했다. 그날도 헌혈을 하고 집에 누워서 무슨 영화를 볼지 생각에 빠졌다. 내 피를 뽑아 갔던 곳에서 전화가 왔다. "혈액에서 HIV 바이러스가 검출됐어요. 가까운 보건소에 가보세요."

나는 원래 쾌활하고 긍정적이다. 보건소에 가서 다시 검사해 보면 위양성(본래 음성인 결과가 양성으로 잘못 나온 경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HIV 위양성율', '에이즈 증상' 등을 검색하며 보건소에 갔다. 의사는 재검하자는 내 요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너무 확실해요. HIV 보균자 맞아요." 확진 받고 보건소를 나와 집으로 가던 길, 높기만 하던 하늘이 조각조각 깨져 내 눈앞에 파편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가족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가족이랑 살갑게 지내는 편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내 인생 신념을 따르기로 했다. 지금도 부모님은 내가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앞으로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난 지금도 정말 행복하고,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적인 약물 치료 덕분에 그 흔한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요즘 내 또래를 보면 위가 안 좋아서 금주한다고 난리다. 그런데 이 맛있는 걸 왜 끊지? 나는 알아주는 애주가, 애연가다.

이런 내게도 시련은 있었다. 감염 후 몇 년이 지났을 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그는 집을 뒤졌다. 약봉투를 발견하고 내 감염 사실을 알았다. 나는 주기적인 치료로 감염력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내 잘못이었다. 고맙게도 그는 나를 용서했다. 하지만 연인은 언젠가는 헤어지는 게 운명이다. 우리에게도 그 고비가 찾아왔고 나는 이별을 고했다. 앙심을 품은 그는 가까운 친구들부터 SNS로만 연결된 지인에게까지 내 감염 사실을 폭로했다. 이를 '아웃팅'이라고 한다. 내가 살던 하늘은 다시 무너졌다.

일방적인 아웃팅 후, 잠잠하던 내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 소식을 접한 내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걱정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어?". "그 놈은 정말 왜 그런다니!", "다른 건 걱정하지마. 우리는 항상 네 편이야."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병균도 내 몫이라 생각했던 나지만, 뜻밖의 반응에 마음 한켠이 말랑말랑해졌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 하구나. 그러고 보니 술집에 갈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들리던 "동성애하다가 에이즈나 걸려라!"는 농담을 못 들은 지 꽤 된 것 같다. 동성애자와 감염인에게 한국사회는 아직 한없이 박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바뀔 거라 믿는다.

#어느날_들이닥친_보건소_직원_"당신_에이즈라며"

내 닉네임은 진달래. 어느덧 40대 '아재'다.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황석영 작가의 '삼포 가는 길'이라는 소설이 함께 떠오른다. 왠지 모를 이질감이 불혹에 접어든 나의 온 몸 마디마디를 근질인다. 소설 속 공사판을 전전하는 뜨내기 정씨는 고향 삼포를 그린다. 이름도 정겨운 삼포는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섬"이다. 내 고향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저기 저 아래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살았던 나는 정씨와 달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정말 아름다운' 내 고향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냥 싫다.

난 게이로 살아왔다. 이성애자 눈에는 잘 안보이겠지만, 게이는 게이를 알아본다. 우리 고향에도 친하게 지내는 게이가 여럿 있었다. 14년 전 어느 날, 친구들과 장난삼아 HIV 검사를 받으러 갔다. 아주 장난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있었다. 그래도 "설마 내가 '그거'겠어"라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깔려 있었다. 결과는 HIV 양성판정. 검사를 받은 셋 중 나만 감염됐다.

그 후 1년은 지옥이었다. 면역력을 결핍시킨다는 놈은 내 몸에 병 6가지를 한꺼번에 오게 했다. 매일이 병과의 사투였다. 양성 사실을 알고 "왜 내가?"라는 생각에 치밀던 분노도 무기력함이 잡아먹었다. 그저 아픈 몸으로 창밖을 보며 해가 뜨고 지는 것만 바라보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난영화에서 볼 법한 허연 보호복으로 무장한 보건소 직원들이 내가 살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누가 봐도 수상한 복장으로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에이즈 환자라며."

불법이다. 당사자가 아닌, 게다가 의료진이라는 명함을 단 그들이 이렇게 나의 감염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6가지 병이 잡아먹은 내 몸과 정신은 그들의 위법한 행동에 화를 낼 힘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순순히 그들을 따라갔다. 이후, '땅은 남아돌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는' 고향에 내 감염사실은 파다하게 퍼졌다. 친하게 지내던 게이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 간 날, 주인 양반들은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그때 결심했다. 고향을 떠나야겠구나.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다. 서울에 정착한 지금, 남들은 나이 들면 고향 생각이 난다는데 나는 별 생각이 없다. 나를 슬슬 피했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도 딱히 없는데 이유를 모르겠다. 내 마음의 고향은 어린 시절 내 작은 발이 딛었던 땅이 아닌, 지정병원에서 나를 치료했던 감염내과 의사 한 분이다. 등에 혹이 커다랗게 나서 수술이 필요했는데 같은 병원의 성형외과 의사는 날 거부했다. 이 사실을 안 내 주치의는 감염내과에서 성형외과 섹션으로 쿵쿵 걸어가더니 그 사람과 싸웠다. 지금은 현직에서 물러난 분이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고향보다 그때 그 의사의 자리가 더 깊다.

HIV/에이즈 감염인 3명이 7월 30일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감염인의 인권 보호를 촉구하는 자석이 인터뷰 장소 벽에 부착돼 있다. /이새롬 기자

#병원_복도에_앉아서_보낸_3일밤 #에이즈환자가_왜이렇게_멀쩡해

동명이인도 있지만 김문수라는 이름을 쓰겠다. 이미 '5학년'을 넘어 '6학년'을 바라보는 나이다. 내가 HIV 바이러스 감염을 알게 된 것은 24년 전의 일이다. 나는 다부진 체격과 활발한 성격을 가진 20대 사나이였다. 군대도 문제없이 전역했고, 예비군 훈련도 빼먹지 않았다. 국가의 부름이었지만 잊을만하면 매년 부르는 예비군 훈련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혈을 하면 집에 일찍 보내준다는 조교의 말에 빳빳한 군복 소매를 걷었다. 그 날 나는 내 몸 속에 낯선 손님이 똬리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차마 가족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5년을 고민했다. 이걸 알려야 할까, 말아야 할까. 스스로 감염인이란 사실도 익숙해질 때 쯤이다. 망치를 맞은 듯한 일로 가족이 알게됐다. 휴대전화도 없을 시절이었다. 보건소 직원은 가족과 함께 살던 우리 집 집전화로 전화해 부모님을 찾았다. "아드님이 '관리해야 할' 병에 걸리셨습니다." HIV 감염은 '걸리면 죽는 병'으로 여겨졌던 시대였다. 나도, 가족도 준비되지 않았다. 모든 게 악몽이기를 바랐다.

어느날 잠에서 깨어보니 이마에 'HIV'라는 커다란 낙인이 찍혀있는 기분이었다. 다름아닌 병원이 그걸 가장 뼈저리도록 느끼게 해줬다. 2005년, 온 몸이 뜨겁고 아팠다. 체온계 속 수은은 40도를 가리켰다. 집 근처 응급실로 달려갔다. 의사의 목에 걸린 차가운 청진기라도 대주기를 바랐다. 그럼 펄펄 끓는 열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감염인 옆에 다가오려는 의사는 없었다. 고열로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 누구도 입원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복도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앉아 3일 밤을 샜다. 그제야 나를 위한 병상 하나가 마련됐다.

감염인이 진료 거부를 당하는 사례는 흔하다. 내가 알던 친구 하나는 병원에서 입원을 안 시켜줘서 바로 앞 여관에 자리 잡고 치료를 받았다. 입원비가 비쌀까, 여관방이 비쌀까 따져보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아,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이 나라는 의사마저도 HIV 감염인을 보듬어 주지 못하는 세상이구나. 일단 컴퓨터를 켜고 카페를 하나 만들었다. 감염인이란 말과 함께 활동가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지금의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활동에 뛰어든 지 10년을 넘겼다. 20대 팔팔한 청년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하늘의 뜻을 안다는 오십 줄에 접어들었다. 이 나이까지 멀쩡한 나를 지켜본 가족들은 그때 청천벽력을 내려준 보건소 직원이 사기꾼이 아니었을까 농담을 한다. 여전히 할 일은 많다. 편견과 차별에 질식 당하는 우리 감염인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게 내 꿈이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우리 병원이 장비가…"라고 말끝을 흐리는 의사를 더 이상 보지 않는 게 내 꿈이다. 감염인이 오로지 제 몸 걱정만 하고 당당하게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날이 오는 게 내 꿈이다. 난 꿈이 많다.

Nothing really matters, Anyone can see

정말 아무렇지 않아. 다들 알잖아

Nothing really matters to me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Anyway, the wind blows

어쨌든 바람은 불어오잖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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