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언론계 "범행과 관련없는 사생활 공개 경계해야"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유기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고유정(36)의 긴급체포 당시 영상이 한 매체에 공개돼 공분이 일었다. 27일 고씨의 체포영상을 내보낸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시청율 11%(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4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수사 당국자가 아니면 보기 힘든 흉악범의 긴급 체포현장에 국민적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현직 경찰이 체포영상을 임의로 유출한데다 국민의 알권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논란이다.
이 영상은 제주동부경찰서가 지난달 1일 오전 10시 30분경 고씨가 살던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촬영했다. 박기남 전 제주동부경찰서장이 언론에 제공했다. 경찰청 훈령 제917호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 제4조는 "사건 관계자의 명예, 사생활 등 인권을 보호하고 수사 내용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수사사건 등은 그 내용을 공표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한다. 일부 매체는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중 체포된 고씨의 외양과 언행, 수갑의 형태와 수갑이 채워지는 과정까지 여과없이 공개했다. 카메라는 고씨가 연행돼 차에 오르는 과정을 일일이 따라간다. 앞서 언론의 보도로 체포된 지역의 세부사항이 공개된 것까지 치면 주민 피해를 우려할 만큼 정보가 지나치게 노출된 셈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흉악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계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혐의가 확정된 고씨의 신상공개에 찬성한다. 그러면서도 "체포 당시 모습이 국민의 알권리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다. 범죄자의 신상을 어떠한 명분도 없이 눈요깃감으로 여기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역시 고씨의 신상공개에 찬성한다는 강태근 법률사무소 신록 변호사는 "사건 초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일련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고씨는 신상고지 명령에 따라 얼굴과 주소지 등 모든 신원이 밝혀졌다"며 "범행 이외 불필요한 정보까지 공유되는 현상은 대단히 이례적이다. 그저 고씨의 얼굴이 궁금해 흥미 위주로 소비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고씨와 같은 사건 관계자의 영상이 유출된 자체만 두고 위법하다고 볼 수는 없다. 같은 훈령에 "범죄유형과 수법을 국민들에게 알려 유사한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라는 예외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전남편을 살해해 시신을 은닉한 고씨의 범행 수위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공개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익명을 요청한 경찰 전문가는 "고씨의 잔혹한 범행으로 신상공개가 결정됐는데 고씨 본인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이미 수사가 상당히 진행됐고 혐의도 확실한 범죄자의 체포영상을 공개하는 것은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예외조항이 가리키는 범죄의 '유형'과 '수법'의 재발 방지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다. 이 영상은 고씨가 당황한 표정으로 "왜요. 제가 다 안했는데…", "제가 오히려 당했는데"라고 범행을 부인하는 것이 전부다. 재발방지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 다른 예외조항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로 인하여 사건관계자의 권익이 침해되었거나, 침해될 우려가 있는 경우"도 고씨의 체포영상은 해당사항이 없다. 오히려 영상 공개로 체포현장인 아파트가 그대로 노출돼 주민의 피해가 우려된다.
현직 경찰이 임의로 수사정보를 유출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토대로 무분별한 언론보도와 대중의 소비가 발생하는 현상도 경계 대상이다. 이승선 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범죄자의 신원을 보도할 때 정치인, 재벌처럼 공인이 아닐 경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고씨는 기본적으로 사인(私人)이고, 합법적으로 신상공개가 다 이뤄진 상황이라 언론인의 의무와 국민의 알 권리는 이미 충족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범행과 관련없는 사생활이 언론으로 유출되는 것은 고씨 본인을 떠나 그의 어린 아들 등 무고한 가족에게 2차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고 했다.
영상을 유출한 박 전 서장은 앞서 부실수사 논란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박 전 서장은 고씨 사건과 관련해 언론브리핑을 열 때마다 피의사실 공표라는 취지로 말을 아껴 도마에 올랐다. 지금은 피의자의 범행과 별 관계없는 영상을 유출했다는 논란의 중심에 섰으니 아이러니하다. 전문가들은 이를 계기로 범죄자의 신상공개와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전반적인 제도적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익명의 경찰 전문가는 "경찰 입장으로서는 신상공개 명령에도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고씨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커 (영상을 언론에 공개하는 것이) 적절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며 "실제로 이미 신상공개 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범죄자의 신원을 어디까지 어떻게 공개할지 세부적인 지침이 없다. 현직 경찰도 애매한 입장"이라고 했다.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르면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특정 요건을 모두 갖춘 특정강력범죄사건의 피의자의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현행법은 어떤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할지 요건만 규정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고씨가 신상공개 명령에 반발하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정수리 꼼수'를 부렸을 당시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던 이유다.
이승신 교수는 "피고인의 범행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면 피의사실공표죄로 엄격히 처벌하는 형법과 달리, 수사기관의 신원공개는 고씨 사례처럼 경찰청 내 훈령으로만 다스린다"며 "범죄자의 신상공개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관련 법률을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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