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 5층에서 맞은 6.10 기념일…야만의 흔적 그대로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1987년 1월 13일 서울, 스물둘 청년은 하숙집 방에 몸을 뉘였다. 몸은 무거웠다.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구속돼 출소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은 탓이다. 자정이 지날 무렵, 사내 6명이 그의 방에 들이닥쳤다. 어디로 끌고가는 걸까. 경찰서는 아닌 것 같다. 둔탁한 전철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곳은 말로만 듣던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고문실이었다.
“냉수를 몇 컵 마시고 심문을 시작했는데, 책상을 ‘탁’하고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이던 고 박종철 열사는 끌려간 지 하루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지만 진실이 드러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5개월 후 6월민주항쟁의 불씨가 됐다. 그로부터 꼭 32년이 지난 이날, 대공분실의 좁은 복도는 수사관 대신 열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으로 가득 찼다.
◆ 굽이진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곳
민주인권 기념관으로 다시 태어난 대공분실은 7층 건물이다. 1층은 역사관, 4층은 박종철 기념 전시실, 5층은 고문이 자행된 조사실이 있다. 나머지 층은 사무실과 회의실 등으로 쓰인다.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5층 조사실만큼은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갔다. 32년 전 박종철 열사도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이 돌아오지 못 할 계단을 밟았다.
나선형 계단은 건물 뒤편 작은 출구로 들어가면 바로 나온다. 2~4층은 갈 수 없고 5층 조사실로 직통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굽이진 계단밖에 보이지 않아 서있는 곳이 몇 층인지 알 수 없다. 5층에 들어서면 14개의 조사실이 있다. 3평 남짓한 조사실은 교도소처럼 변기와 세면대가 드러나 보인다. 혹여 조사를 받다 뛰어내릴까봐 창문은 어린 아이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게 만들었다. 한창 조사실로 쓰일 때는 여러 고문기구가 있었지만 현재는 박 열사가 숨진 509호를 제외하고 깔끔하게 치워졌다.
박 열사가 숨진 509호 앞에는 많은 이들이 멈춰 섰다. 변기와 세면대 옆 물고문이 이뤄진 작은 욕조가 맞붙었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동기회’라 적힌 깃발이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조그만 방 앞에는 오전에 열린 기념식을 찾은 방문객, 10일을 맞아 관람 신청을 한 학생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대만에서 온 대학생 T(24)는 한국어가 서툴러 기념관 안내 글을 읽을 수는 없다. 하지만 32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실감하는데 언어의 역할은 적었다.
“대만과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관심이 많았는데 얼마 전 영화 ‘1987’을 보고 박 열사가 돌아가신 곳을 꼭 직접 보고 싶었어요. 직접 와서 보니까 많이 슬프고 답답해요.”
그는 박 열사가 숨을 거둔 작은 욕조를 바라봤다. “이곳에서 희생된 박 열사와 시민들을 만난다면 꼭 건네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고생 많았다고, 존경한다고요.”
◆ 경찰 아닌 시민의 품에서 맞은 6월
이날 오전에는 기념관 앞에서 '제32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식'이 열렸다. 2007년 행정안전부는 6월 10일을 6·10민주항쟁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잔뜩 찌푸린 날씨는 회색 벽돌로 지어진 대공분실 건물과 꼭 닮았지만 관계자들의 표정은 밝았다. 지난해 12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을 맡은 후 첫 기념식이기 때문이다.
이 건물은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1976년 10월 완공돼 경찰청 산하의 대공 수사실으로 쓰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어디론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어느 누구도 남영동이라 확언하지 못했다. 해양연구소로 위장해 운영했기 때문이다. 이날 기념일을 맞아 방문했다는 박순애(64) 씨는 1970~1980년대 노동운동의 진원지였던 원풍모방(옛 한국모방) 노동조합 부조합장을 지냈다. 그는이렇게 회상했다.
“고문실이 있대요. 남산, 서빙고, 남영동에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거기만 들어가면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어 내보낸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돌았어요.”
대공분실의 정체는 1987년 1월 박 열사의 고문치사가 밝혀지면서 드러났다. 군부독재 정권이 물러난 후에도 공안사범을 조사하는 보안분실로 쓰이다 2005년 과거사 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가 됐다. 2008년부터는 4층과 5층에 박종철 기념전시실을 개관했다. 경찰의 어두운 과거를 반성하자는 취지였지만 당시 가해자였던 경찰이 소유권을 유지해 많은 논란이 일었다. 결국 2018년 12월 법적관리권은 행정안전부로 넘어갔다. 이후 민간단체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위탁 관리 중이다.
이중으로 제작된 두꺼운 철문 옆에 ‘민주 인권 기념관’이라는 간판이 있지만 아직 가명이다. 사업회는 2022년까지 한국 민주주의 교육시설을 둘 예정이다. 사업회 기념관추진단의 조규연 과장은 “교육시설까지 완공하면 새 이름을 지으려 한다. 아직 기획단계지만 국민과 호흡할 공간이니 대국민 공모전을 열어 이름을 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 들어설 건물 이야기가 나오자 한층 더 밝아진 목소리로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분들이 한국 민주주의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6월민주항쟁 32주년을 맞아 기념관에서는 9월 29일까지 전시회 ‘잠금해제 - 언록(Unlock)’ 도 열린다.
조사실 514호에는 홍진훤 작가가 ‘일상의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한 사진들이 걸렸다. 아이가 돌아오길 바라며 세월호 유족이 팽목항에 놓아둔 운동화 한 쌍, 백남기 농민 시신이 안치된 장례식장에 피어오른 흰 연기,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숨진 이은주 씨가 키우던 반려견이 임신한 모습 등이 프레임에 담겼다. 전시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방문객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 했다.
“이 곳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죠. 갈 길이 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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