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기다리며 불안한 생활…"아이들 고통받는 건 볼 수 없어요"
[더팩트ㅣ인천국제공항=송주원 인턴기자] 앙골라에서 온 루렌도 가족은 지난해 12월 28일 경찰의 박해와 정부의 방관을 피해 한국땅을 밟았다. 올 1월에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 신청을 했지만 "난민으로 인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날 루렌도 부부는 많이 울었다. 앙골라로 강제 송환되면 부부는 수용소에 갇혀 생사를 보장할 수 없고, 슬하 4남매도 위험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저희는 지금 죽어도 좋아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고통받는 건 볼 수 없어요."
22일 <더팩트> 취재진과 만난 루렌도 부부가 가장 많이 반복한 말이다. 루렌도 부부는 출입국관리소의 난민 인정심사 불회부 결정을 놓고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에서 기각됐고 현재 항소심을 앞두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 탑승동 46번 게이트 근처 라운지에 가면 6개를 이어붙인 소파가 나온다. 루렌도 가족이 반년 가까이 노숙 중인 곳이다. 루렌도 부부와 레마(9), 로드(8), 실로(8), 그라스(6) 6명의 식구는 여기서 숙식을 해결한다. 녹색 소파는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색이 바랬다. 루렌도 부부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4명의 아이들이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취재를 위해 꺼낸 노트북을 바라봤다. 첫째 아들 레마는 무선마우스를 '쑥'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명랑한 또래 어린이였지만 하루 빵 몇개로 끼니를 때운다. 그나마 오가는 한국인들이 이따금 건네주는 현금을 아껴써야 구할 수 있다.
한국은 2013년 난민법 시행 이래 난민인정률이 한 자릿수다. OECD 36개국 중 34위(2017년 기준)에 해당하는 수치다. 2017년에는 신청자 9942명 중 121명만 인정해 1%대에 머물렀고 지난해 6월 기준 누적 인정률은 4%에 그쳤다. 이처럼 난민에게 문은 좁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직접 난민을 본 것처럼 혐오성 소문이 만연하다. 2016년 내전을 피해 예멘인들이 제주도에 도착하자 제주도 내 미해결 범죄사건 배후에 그들이 있다는 괴담까지 퍼졌다. 이후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도 올라와 70만 명이 넘는 서명을 받았다.
과연 루렌도 가족은 난민에게 차가운 한국에서 살 수 있을까.
응쿠카 루렌도(47)는 1972년 콩고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앙골라 국적의 앙골라인이다. 콩고인이라 앙골라에서 박해를 받았냐는 묻자 “노 콩고(No Kongo), 앙골라(Angola)”라고 단호하게 앙골라인으로서 정체성을 강조했다. 루렌도는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서 무역회사를 다녔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교회에서 아내 보베트 나나브(40)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보베트는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때(처음 만났을 때)는 남편이 잘생겨 보였어요.”
앙골라는 콩고 출신 루렌도를 가만두지 않았다. 앙골라 내전(1976~2002) 당시 콩고 정권이 반군을 지원했다는 이유에서다. 뚜렷한 이유 없이 무역회사에서 쫓겨난 그는 택시기사로 일했다. 차를 다루는데 특히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교통사고가 났고 출동한 경찰은 그가 콩고 출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수용소에 가뒀다. 수용소를 탈출해 집으로 돌아온 그는 경찰이 집까지 찾아와 아내를 성폭행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앙골라를 떠나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바로 집을 팔고 돈을 마련했어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교회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집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손에 쥔 건 인천행 비행기 티켓이었다. 왜 거리도 먼 한국을 선택했냐는 질문도 종종 받는다. “앙골라에서 살 때 한국대사관 옆에 집이 있었어요. 제겐 한국이 가장 친숙한 나라였어요.” 루렌도의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이 아니면 핍박이 기다리는 앙골라 송환 외에는 다른 선택지도 없다.
루렌도 가족은 한국에 도착한 후로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특히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이 마음에 와닿았다. 루렌도는 “한국인들, 정말 열심히 일하더라”라고 감탄했다. 무역회사부터 택시기사까지 아내와 4남매를 위해 일을 멈추지 않았던 루렌도는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인과 일맥상통 한다고 느낀다는 그는 난민으로 인정되면 일자리부터 구해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했다. “저는 다른 한국인들처럼 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차를 다루는 일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수리보수 일을 하려고 해요.”
난민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만 고집해 이질성과 위화감을 키울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보베트는 얼마 전 공항 이용객에게 선물 받은 아동용 한글공부책을 보여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해 엄마와 가정학습을 하고 있는 4남매는 매일 엄마가 내준 한글 숙제를 하고 있다.
부부 역시 ‘열공’ 중이다. 부부는 이름부터 간단한 인사말, 우유 등 음식을 뜻하는 단어를 연습한 공책을 보여줬다. 보베트는 “언어를 배우는 것이 그 나라를 배우는 첫 걸음”이라며 “공항에서 나가면 한국어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다”라고 했다. 옆에서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루렌도는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한국어를 연습한 공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언어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정서 모두를 배우고 싶어요. 난민으로 인정되면 한국이라는 나라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낯선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겠냐고 묻자 프랑스어로 “위!(Oui, ‘네’라는 뜻)”라 외치는 그들에게 ‘손가락 하트’를 알려줬다. 보베트는 흩어져 놀던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줬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지와 검지를 겹쳐 보였다. 기념 촬영을 하자는 루렌도의 제안에 모두 손가락을 모았다.
루렌도 가족이 난민으로 인정받는다면 살고 싶은 도시는 바로 서울이다. 한국의 수도인데다 인천과 가까워서일까. 보베트는 “인천과 가깝지 않다” 라고 손사래를 쳤다. 보베트는 성폭행 후유증으로 자궁에 이상이 생겨 긴급 상륙허가를 받고 서울에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서울과 인천은 결코 가깝지 않다는 걸 아는 루렌도 부부의 답변은 특별했다.
“여기 있으면서 우리 가족을 도와주신 분들이 많아요. 우리 재판을 맡아준 이상현 변호인, 여러 인권단체, 그리고 기자들까지 다 서울에 살고 있더라고요. 그분들 가까이 살면서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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