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 정철승 변호사…'인도에 반하는 범죄' 다룬 역서도 펴내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영국 출신의 세계적 인권변호사 필립 샌즈는 웃음이 없었던 외할아버지 레온 부흐홀츠가 생전 말해주지 않았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퍼즐이 맞춰질 때마다 수대에 걸쳐 가족을 짓누른 홀로코스트의 참극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전범을 단죄하는데 기여한 두 인권변호사, 허쉬 라우터파하트와 라파엘 렘킨의 존재가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샌즈 변호사가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법적,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 내용은 국내 출간에 걸림돌이었다. 어학 실력은 둘째치고 법률적 이론·실무 전문성과 역사의식 없이는 온전히 옮겨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덕목을 갖춘 번역자로서 이 책을 한국 독자들 품에 안긴 정철승 법무법인 더펌 대표 변호사는 원저자 필립 샌즈와 공통점이 있다. 질곡의 역사를 거쳐온 가족사를 지녔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 변호사는 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선생(1887~1959)의 외손자이자 장손이다. 윤기섭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교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제7대 의정원장,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족국가 건설에 바쳤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었던데다 6.25전쟁 중 납북됐다는 배경 때문에 1989년에야 건국훈장을 받았다. 정 변호사의 가문은 윤기섭 선생이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에 망명하면서부터 100년 가까이 '독립운동가 가족은 3대가 망한다'는 비극적 통념과 싸워야 했다.
"전쟁 통에 처자식도 두고 납북되신 외할아버지를 이승만 등 정적들은 자진 월북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제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호적도 없앤 채 외할머니를 모시고 가난 속에 수십년을 숨어 사시다시피 했죠. 외할아버지가 뒤늦게 건국훈장을 받으시고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기반을 잡으면서 비로소 우리 가족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같이 처절한 가족사 속에서 자란 정 변호사는 남달리 역사문제에 책임감을 갖게됐다. 광복회 고문 변호사로서 친일파 이해승 재산환수 소송에 참가한 까닭이다. 이해승은 대한제국 황실의 후손이지만 일제에 후작 작위를 받고 특혜로 재산을 축적했다. 이해승의 재산은 친일파재산환수법에 따른 집행 대상 중에서도 300억원대에 이르는 최대 규모를 과시한다. 그런데 재산이 국가에 귀속될 처지가 된 친일파 후손들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중에서 법원이 드물게 원고의 손을 들어준 게 바로 이해승 소송이다.
서울행정법원은 2008년 이해승 후손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서울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당시 고법 재판장이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기소된 박병대 전 대법관이다. 게다가 대법원은 예상밖의 '심리불속행'으로 판결을 확정시켰다. 심리불속행은 상고 사유가 없다고 판단해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제도다. 그뒤에도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던 정부는 2015년 영화 '암살'의 흥행 이후 친일파 문제가 공론화되자 뒤늦게 대법원 재심 청구와 행정소송 제기에 나섰다. 그러나 재심청구는 기각됐고 행정소송도 1심에서 패소했다. 이제 항소심마저 넘겨줄 순 없다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목소리에 정철승 변호사가 원고측 소송참가인으로 재판에 뛰어들었다.
"친일재산 환수 문제는 사유재산권을 신성시하는 현재 법리상 재판에서 불리합니다. 이 문제는 역사적 정의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국가가 있고나서 법이 있기 때문이죠. 반역행위를 한 국가의 적에게 대대로 부귀영화를 보장해준다면 그 국가는 지속가능할 수 없습니다. 전 독립운동가의 직계후손으로서 재판부에 당당하게 주장할 자격이 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돼 지난해 9~10월 선고 예정이던 이해승 재판은 광복회와 정 변호사가 적극 개입하면서 흐름이 달라졌다. 이후 재판부가 한차례 교체되고 선고가 4번 연기된 끝에 31일로 기일이 잡혀 결과가 주목된다.
이 때문에 정 변호사는 최근 '사법농단' 사태에도 분노한다. 특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핵심 혐의 중 하나는 강제징용 피해자가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에 개입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하던 양승태 대법원이 한일관계에 부담을 느낀 박근혜 대통령을 위해 강제징용 소송을 지연시키고 일본 전범기업의 승소를 도왔다는 이른바 '재판거래' 의혹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전범기업 소송대리인인 김앤장 변호사를 직접 만나 사건을 논의한 사실도 드러났다. 정 변호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이하 당시 사법부 수뇌부는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라며 "대한민국의 정의와 일본의 정의가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은 일본의 정의를 대변하는 정의관을 가졌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정치권에서 거듭되는 5.18 망언 역시 같은 각도에서 본다. 정 변호사는 "국제사회는 나치전범을 처벌한 '인도에 반한 범죄'와 관련된 과거사를 부인하는 행위도 범죄로 본다"며 "북한개입설 등 5.18 망언 역시 국가폭력 범죄를 두둔하는 또다른 범죄행위이며 5.18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이 아직도 미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정 변호사가 시간을 쪼개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번역해낸 것도 시민과 함께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다. 정 변호사는 "우리부터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차이를 알아야 일본에 당당히 사죄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책은 독일 나치전범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돼 응징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은 도쿄국제군사재판에서 강제징용, 위안부, 생체실험 등 반인도적 범죄는 빠진 채 침략전쟁 행위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패전국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감수했다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독일과 일본이 과거사에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유죠."
이밖에 '항일독립투쟁사 알리기 운동본부'도 100주년을 맞은 정 변호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다. 박시백 화백이 항일독립운동사를 집대성한 작품 '35년'의 보급 캠페인이 주요사업이다. 지금까지 총 7권 중 5권이 출간됐다.
정 변호사는 "일제강점기 35년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어떤 고통도 마다하지 않은 애국자들이 있다"며 "누가 반역자였고 기회주의자였는지 정확히 알 때 우리 사회의 정의도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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