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수습 촉구 기자회견..."돈많은 기업은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더팩트ㅣ송주원 인턴기자] 2차 대전이 종전으로 치닫는 1944년, 밀러 대위는 미국 행정부가 주는 특별한 임무를 받게 된다. 전쟁에 4형제가 참전한 라이언 가의 아들 중 3명이 전사했고 막내 제임스 라이언 일병만이 프랑스 전선에서 생존했다. 미 행정부는 4형제의 어머니인 라이언 부인에게 막내아들만큼은 되돌려 줘야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밀러 대위에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지시했다. 1998년 개봉한 미국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의 줄거리다.
폴라리스쉬핑 소속 광석운반선 스텔라데이지호가 2017년 3월 31일 우루과이 인근 남대서양에서 침몰했다. 배에는 한국인 8명, 필리핀인 16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한국인 탑승자 중 한 명은 선사에 ‘ㄱ울고 ㅣㅆ습니다’(기울고 있습니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침몰 다음날 새벽 4시에 가까운 시각 2회, 오후 1시에 1회 SOS 재난신호도 타전했다. 그러나 필리핀인 2명을 제외하고 한국인 탑승자 8명을 포함한 20명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족대책위)‧시민대책위원회는 26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로 외교부청사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인규명과 유해수습을 촉구했다. 전날부터 내린 비로 날씨는 잔뜩 얼어붙었다. 바로 앞이 차도였던 탓에 회색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생생한 차 소리가 더욱 쓸쓸하게 들렸다. 기자회견을 연 가족대책위 등은 물론 취재진까지 찬바람에 볼이 빨개졌다.
그러나 당장 살갗을 에는 추위는 가족을 바닷속에 둘 수 밖에 없었던 피해자 가족의 꽁꽁 언 마음에 견줄 것이 못됐다. 2등항해사로 침몰선에 탑승한 허재용 씨의 누나 허경주 가족대책위 공동대표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국가가 국민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피해자가 된 후 이 영화가 자꾸 생각난다"며 "한 명도 아니고 여덟 명이다"라고 울먹였다. 상기됐던 얼굴은 슬픔으로 더욱 붉어졌다.
허 대표는 "외교부는 가해자 폴라리스쉬핑 측에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수색 비용을 지불하는 선의를 베풀어 달라’고 했다. 그런 '부탁'을 받고 선사가 자기들 배가 침몰한 사고 진상을 솔직하게 밝힐 수 있겠냐"며 "게다가 (외교부) 몇몇 공무원이 제 동생일지도 모르는 유해를 발견 후 뼛조각을 ‘물체’라고 했다. 수색업체는 계약서에 유해 직접 수습은 조항은 없어 그대로 두고 왔다"고 했다. 이어 "왜 계약서에 (유해 수습) 조항을 넣지 않았냐고 물으니 가족이 요청하지 않았다고 했다"고 밝혔다.
수색업체 오션인피니티는 지난 2월 수색작업에 착수하고 14일 사고 해역에서 사람 뼛조각으로 보이는 유해 일부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직접 수습은 (한국 외교부와) 별도 계약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계약을 한 바 없다"며 유해를 그대로 둔 채 수면 위로 올라 왔다. 외교부는 3월 13일 오션인피니티와 계약 당시 작성한 문건을 ‘영업상 비밀’이라며 비공개 처리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수색업체 쪽에선 (유해수습 조항을 넣으려면) 별도 계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수색 예산 53억 원에서 유해수습까지 넣을 순 없었다"고 말했다.
4개월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노동자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 김미숙 씨도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김 씨는 "자식이 사고를 당한 슬픔을 극복하기에 바쁜 피해자 가족이 이렇게 차가운 도로 위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하는 대한민국 현주소가 안타깝다"며 "나는 정치,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은 사람이 제일이다, 사람중심이 철칙이라는 것은 잘 안다"고 했다. 그는 끝내 잠긴 목소리로 "서민은 돈이 없으니 법을 잘 지킨다. 그러나 돈 많은 기업은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며 "기업이 무서워하도록 근로자 안전을 지키는 법을 만들어 노사 간 상생을 이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가족이 차가운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공통점을 가진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와 유족 일동도 함께 했다. 고 이민호 군 아버지 이상영 씨는 기업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김 씨의 발언에 동의하며 "근로자가 회사에서 사망해도 기업 제재가 일절 없다. 1억원이든 10억원이든 과징금만 내면 그만이다"라고 했다. 이 씨는 "과징금이 아닌 벌금형을 선고하면 기업에 근로감독이 상주하는 등 특정 제재가 이뤄진다. 대한민국 법은 기업에 면죄부를 주지 않으려고 절대 벌금을 물게 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월 15일 공표돼 내년부터 시행 예정인 산업 현장의 안전규제 강화 개정안 ‘김용균법’에도 도금 등 위험 작업 금지와 위반 시 최대 10억 원 ‘과징금 부과’라는 법안만 포함된 상태다. 벌금은 범죄를 일으킨 범인에게 일정액 이상의 금액을 징수하는 형벌인데 반해 과징금은 의무불이행으로 금전적 부담을 주는 조치에 불과하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가족대책위 등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보내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원인규명과 유해수습 촉구’ 서한문을 전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단체를 비롯해 TvN 고 이한빛 PD 유가족 일동, 삼성전자 반도체 백혈병 고 황유미 씨 유가족 일동, 4.16세월호를기억하는시드니행동 등 국‧내외 94개 단체가 참여한 서한문에는 ▲9일 만에 중단된 심해수색 ▲외교부 공무원 ‘물체’ 발언 ▲선사 측에 수색비용 부탁 등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외에도 ▲진상규명을 위한 3D 모자이크 영상 ▲행방불명된 구명벌 위치 확인 ▲유해 수습 TF 설치 등 요구안도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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