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80대 노인이 되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간다면
[더팩트ㅣ임현경 기자] "기계를 조금만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도 어지럽고 골치 아파. 자꾸 모른다고 말하기 창피하기도 하고." 서울 종로 어느 영화관 키오스크(Kiosk, 무인단말기) 앞에 선 노인에게 다가가 '왜 바라만 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거나 꾹꾹 눌러볼법도 한데, 그는 마치 몹쓸 것을 본듯이 휙 돌아서 직원이 있는 매표소로 걸어가 줄을 섰다.
침대에 편안히 누워서도 원하는 영화를 예매할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노인들은 직접 영화관에 찾아와서야 상영표를 보고 영화를 고른다. 곧바로 상영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적당한 영화가 없다면 반나절을 기다려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면 다음을 기약하며 근처 공원이나 집으로 향한다.
그들은 스마트폰이나 키오스크에 대해 말하며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일처럼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어른이라면 자고로 배울 점이 많아야 하는데, 요즘엔 아무것도 몰라서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것이 없다"며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노인도 있었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한 노인들의 고충을 살펴보니 춘자 여사가 떠올랐다. 춘자 여사는 필자의 할머니로, 1935년 태어나 올해로 만 84세가 됐다. 그는 스마트폰보다는 폴더폰이 다루기 편하고, 디지털보다는 '돼지털'이란 단어에 익숙한 세대다. 손녀와 31가지 맛을 고를 수 있다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사랑에 빠진 딸기'를 먹을만큼 세련된(?) 사람이지만, 혼자서는 낯설고 어려워 주문조차 못할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거리, 영화관, 카페,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만난 노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춘자 여사의 일상을 상상해보기로 했다. 필자가 평소 간편하고 당연하게 이용했던 생활 시설이 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이 글은 시민 인터뷰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35년생 춘자 씨의 하루로 재구성했다.
#오전 9시
아침을 먹고 TV 앞에 앉은 지 3시간이 지났다. 의미 없이 리모컨을 누르던 춘자의 시선이 멈춘 곳은 겨울맞이 스카프 세일 방송 중인 홈쇼핑 채널이었다. 화면 하단에 있는 작은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자동주문 전화를 이용하면 3000원을 더 할인해준다"는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숫자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춘자는 얼른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사실 춘자는 전화기와 썩 친하지 않았다. 특히 ARS라는 목소리와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자식들은 폰뱅킹을 해보라고 성화지만, 춘자는 전화기를 몇 번 누른 것만으로 돈을 보낸다는 사실을 순순히 믿기 어려웠다. 어느덧 기계음은 '멜란지 그레이', '버건디', '네이비' 중 뭔가를 고르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아무 숫자나 눌러보니 '카드 CVC 번호'를 입력하란다.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멀리 사는 딸을 불러다가 주문을 해달라고 할까, 3000원을 포기하고 상담원 연결을 시도할까 잠시 고민하던 춘자는 이내 전화기를 내려놓고 채널을 돌렸다.
#오후 1시
춘자도 때론 커피를 마시고 싶다. 배부르게 밥을 먹은 뒤 적당한 간식과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이 꽤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녀 없이 혼자 밖에 나와 커피를 사는 건 쉽지 않았다. 커다란 카페에 들어가 주문을 하자니 대체 어떤 음료를 파는지, 무슨 맛을 내는지부터 알기 힘들었다. 저 멀리 벽에 걸린 메뉴판의 자잘한 글씨들을 읽기엔 눈이 침침했고, 직원에게 물어도 '그란데'며 '아인슈페너'며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튀어나왔다.
집 근처 마트에서 간단한 장을 봐온 길, 춘자는 큰 카페가 아닌 작은 카페를 찾아가 봤다. 간판에 꽤 큼직한 글씨로 '990원'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가게에 직원은 없고 웬 자판기 같은 기계와 손님들만 좁은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자판기를 누르면 유리 벽 안쪽에 있는 사람이 주문한 음료를 건네주는 것처럼 보였다. 기계로 커피를 고르려 했지만, 역시나 사진과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충 아무거나 골라놓고 나니 'IC카드'를 투입구에 꽂으라는 설명이 나왔다. 춘자는 IC카드가 뭔지 알 수 없었다. 가진 지폐와 동전을 넣으려 다른 구멍을 찾아봤지만, 옆에서 누군가 '카드 전용'이라며 춘자를 말렸다. 춘자의 주문이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 두어 명이 그의 뒤에 줄을 섰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려니 부끄러웠고,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결국, 춘자는 도망치듯 작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부동산 김 씨는 그래서 카페 대신 햄버거집에 간다고 했다.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같은 곳에서는 뜨겁냐 차갑냐, 크냐 작냐만 정하면 쉽게 커피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씨의 말이 문득 생각난 춘자는 바로 옆 햄버거집으로 향했지만, 조금 전 작은 카페에서 본 것과 비슷한 기계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춘자는 기계에 소금을 뿌리듯 따가운 눈빛을 쏘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괜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더니 무릎이 더 쑤시는 것 같았다.
#오후 7시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 다시 TV 앞에 앉았다. 악독(마음이 흉악하고 독한)한 시아버지가 알고 보니 친아버지였다는 내용의 일일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광고 시간이었다. 갑자기 화면이 밝아지더니 11년 만에 돌아온 나훈아가 앙코르 콘서트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면서도 간드러진 노래가 울려 퍼졌다. 춘자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나훈아 콘서트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딸은 "딸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는 시원치 않은 답을 내놨다.
손녀는 "인터넷에서만 예매할 수 있다"며 "예매 시간에 맞춰 빨리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야만 표를 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영 교실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구립 체육센터에서 열리는 수영 교실은 신청이 시작되는 날 아침 일찍 센터에 가면 얼마든지 등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훈아 콘서트에는 매표소가 없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표를 사는 게 아니라, 이미 산 표를 종이로 바꿔 받는다는 것이다.
춘자는 손녀에게 도움을 청해봤지만, 손녀는 "그날 일이 있어 힘들 것 같다. 어차피 나훈아 표는 3분 안에 다 팔려서 가망이 없다"며 우는 소리를 냈다. 딸은 춘자와 마찬가지로 기계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춘자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나훈아를 포기해야 했다. 다들 어떻게 나훈아를 보러 가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손주가 없거나, 바쁜 손주를 둔 노인들은 나훈아를 영영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