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수사 착수 8개월 만 전·현직 사법부 수장 첫 기소
[더팩트ㅣ서초=임현경 기자] '사법농단'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재판에 넘겨졌다. 사법부 수장이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는 것은 전·현직 통틀어 처음있는 일이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오후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며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을 불구속 기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추가 기소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넘겨진 것은 이탄희 판사의 부당 인사조치가 보도된 지 1년 11개월, 검찰이 본격 수사에 착수한 지 8개월 만이다.
검찰은 300여쪽에 이르는 공소장을 통해 양 전 대법원장의 재판 개입,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 등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를 적시했다. 공소장에 적시된 범죄 사실은 △ 사법부 조직 위상 강화 및 이익 도모 △대내외적 비판세력 탄압 △판사 비위 은폐·축소 등 부당한 조직 보호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편성 및 집행 등 크게 4가지로 분류되며 세부 혐의는 총 47개에 달한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도입, 법관 재외공관 파견 등 사법주 조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재판개입을 계획·실행했다고 판단했다. 청와대와 외교부의 지원을 받아낼 목적으로 강제징용 손해배상 사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노조 통보 처분 사건,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 등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견제 목적으로 직권을 남용한 혐의도 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헌법재판소 내부 사건 정보 및 동향을 수집하고 청와대를 통해 압박을 시도한 것으로 봤다. 또한 법원행정처 심의관에게 헌법재판소장을 비난하는 기사를 작성케한 후 모 언론사 기자 명의로 게재하도록 지시한 혐의도 적용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법관의 자유로운 의견 표명과 정당한 비판, 독립된 재판을 억압한 정황을 확보했다.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을 비판하거나 부담을 주는 행동을 한 법관들에 대해 문책성 인사조치를 단행했으며 국제인권법연구회 및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의 활동을 저지하고 와해시킬 목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한 혐의도 다수 있다.
사법부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법관의 비위를 은폐·축소한 혐의도 있다. 법원행정처 차원에서 부산고등법원 판사 비위를 덮었으며, '정운호 게이트' 검찰 수사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수사 기밀을 수집하고 영장재판 개입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허위 명목으로 예산 편성·집행한 의혹도 존재한다. 검찰은 법원행정처가 공보관실 운영비 3억 5000만원을 불법 편성한 뒤 양 전 대법원장 명의로 지급하는 고위간부 대상 격려금에 사용했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지급결의서·수령확인증 등 관련 서류를 허위로 작성하도록 지시한 혐의가 더해졌다.
서울중앙지법은 이날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공소장을 접수하고 배당 절차를 진행 중이다. 어느 재판부가 '전직 사법부 수장'의 재판을 심리할지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법원은 원칙상 무작위 전산으로 사건을 배당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로서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35·36부 중 하나에 배당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된다. 해당 재판부는 지난해 11월 신설된 곳으로, 기존 재판부보다 진행 중인 사건 부담이 적으며 피고인들과 직접적인 연고 관계가 없는 법관들로 구성돼있다.
이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을 맡고 있는 형사합의36부(윤종섭 부장판사)가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병합해 심리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의 공소사실 대다수가 중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소장 분량을 다 합하면 550쪽에 육박하는 만큼, 한 재판부에 과도한 업무를 배당하기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의 1차 공판준비기일은 3월에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임 전 차장도 기소 26일 후 첫 공판기일이 열린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