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보다 유능한 대리인이 필요한 시대다"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한 번 스텝이 꼬이니 계속 엉킨다. 현재 중학교 3학년에 적용되는 2022학년도 대입 제도 개편안 이야기다. 교육부는 대입 제도 개편안을 발표하면서 세부 시행방안은 대통령 자문기구인 국가교육회의에 넘긴다고 했다. 그러자 국가교육회의는 공론화 등을 통해 오는 8월 초까지 최종 권고안을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이를 위해 대입제도 개편 특별위원회(대입특위), 공론화 위원회(공론화위) 등 2개의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했다. '대입특위'는 여러 가지 쟁점사항 중에서 어떤 것을 공론화 대상으로 정할지 등을 결정하고, '공론화위'는 수학능력시험 평가 방법(절대‧상대평가, 원점수제도) 등이 포함된 5~6가지 안을 국민 토론에 부쳐 최종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위임과 공론화를 통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육부는 국가교육회의에, 국가교육회의는 대입특위와 공론화위 등 하부 기관에 핑퐁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니 계속 꼬이기만 한다.
공론화는 신고리 원자력발전 5.6호기 건설중단여부를 결정할 때 도입해서 호평을 받았다.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시민대표단이 원전에 대해 학습과 토론을 거쳐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뒤 공론조사방식으로 의견을 수렴해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론화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찬‧반 여론조사와 달리 시민들이 현안에 대해 공부를 한 뒤 의사결정을 한다는 점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갈등해결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론화가 우리 사회 갈등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공론화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우선 공론화를 위한 사전 준비과정과 시민대표단 선정 등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는 부적합하다. 또 사안이 복잡할 경우에는 공론으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 대입 제도 개편안이 그렇다. 선발의 공정성과 수월성, 고교정상화 등 여러 가지가 맞물려 있어 시민대표단이 과연 학습과 토론을 통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는 다원화, 전문화되는 추세여서 일반인들의 상식에 기반을 둔 공론(公論)을 끌어내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전문가의 전문적 식견과 판단이 요구돼 공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공론화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법원장은 최근 헌법재판관 지명도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결정하도록 내규를 바꾸겠다고 했다. 일견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원회 위원 인선에 대법원장의 의중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옥상옥이라고 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으려 위원회를 방패로 삼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촛불시위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퇴진한 이후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을 촛불시위로 무너뜨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시민참여가 만병치료제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사회가 너무 비대해졌고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또 시민참여가 항상 봇물처럼 넘치는 것도 아니다. 사전투표제도를 도입할 정도로 낮은 투표율이 이를 말해준다. 매사에 시민들이 나서면 그 사회는 비정상적이다. 그렇게 되면 피곤한 건 시민들이다.
시민들의 참여보다 대리인들이 운영하는 사회가 정상적이고 더 잘 작동한다. 공무는 공무원, 법률서비스는 판사‧검사‧변호사, 정치는 국회의원 등 대리인들에게 맡기고 이들을 잘 부리면 된다. 공연히 시민참여니 공론화니 해서 덧나게 할 필요가 없다. 공론화가 남발되면 공론(公論)이 아니라 공론(空論)만이 넘치게 된다. 공론화보다 유능한 대리인이 필요한 시대다. 공론화는 꼭 필요한 곳에 엄격히 사용되도록 절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