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임태순 칼럼니스트] 강원도 평창으로 내려간 형이 봄나물이 올라있는 어머니 밥상을 사진으로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다. 보름 전 형 집에 다니러 간 어머니가 한상 차린 것이다. 형은 어머니는 낮에는 집에 있기 갑갑한지 밖으로 나와 근처에서 나물을 뜯는다고 했다. 봄볕을 받으며 나물을 캐는 어머니의 평화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서울에서 지낼 때에는 아프다는 얘기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평창에 가신 이후론 그런 말씀이 쑥 들어갔다. 아흔이 넘었어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쉬엄 쉬엄 나물을 캐면 적당히 운동도 돼 절로 건강해지는 모양이다. 밥상은 봄나물로 풍성하지만 조촐하다. 봄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러나 그 힘은 뜻밖에도 소박함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원도에 살던 어린 시절 누나를 따라 봄나물을 캐러 간 적이 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그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그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봄 나물 캐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는 대단한 봄맞이 이벤트라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내 나이 여섯 살 아니면 일곱 살이었고 여덟 살 위인 누나는 중학생이었다. 어느 봄 날 아침 동네 친구와 앞산에 나물 캐러 가는 누나를 따라 나섰다. 어떻게 산을 올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 덧 산 구릉지에 다다랐다. 긴 겨울을 이겨낸 봄나물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한 겨울 추위로 모든 것이 꽁꽁 얼었지만 나물은 뿌리를 굳건히 뻗어 땅 속의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버텨낸다. 가히 생명력의 화신이라 할 만하다. 대지가 눅눅해지자 싹을 틔운다. 엄동설한을 이겨낸 봄나물에는 비타민 등 온갖 영양분이 가득하다.
누나와 친구는 쪼그려 앉아 달래, 냉이 등 나물을 캐 바구니에 담는다. 뿌리째 올라온 나물에선 그윽한 향내가 풍겨온다. 두 사람은 나물을 뜯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물을 다 캐면 자리를 옮긴다. 누나를 따라 다니며 귀찮게 굴던 나는 혼자서 놀다 저 멀리 있는 누나를 보고 달려간다.
하늘은 파랐고 공기는 맑다. 봄 햇살은 따스하고 이따금 봄바람이 불어온다. 주위의 나무는 푸른 기운을 뿜어낸다. 가만히 앉아 먼 산만 바라봐도 기쁘고 힘이 난다. 단순히 나물 캐는 것에서 이런 즐거움과 만족을 맛볼 수 있다니 잘 믿겨지지 않는다.
며칠 전 EBS의 한국기행을 보니 어르신들이 청춘가를 부르며 나물을 캐고 있었다. 동네 친구와 함께 나온 할머니는 “몸은 늙고, 세월은 흘렀지만 봄이 돌아왔는데 어찌 가만 있을 수 있느냐”며 웃음꽃을 터뜨렸다. 나물을 뜯으며 봄도 한 가득 캘 수 있으니 집에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봄나물 캐기는 돈 안 들고 만족도 최고인 저비용, 고효율의 봄맞이 행사다. 계절과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이자 평범한 일상속의 보물이자 보석이다. 이러니 처녀는 물론 어머니, 할머니까지 여심이 나물캐기에 동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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