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순의 길거리 사회학] 벌써 처서(處暑)? 날씨에 대한 아련한 추억

입추가 지나면서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 더위도 한풀 꺾이고 있다. 사진은 무더위를 피해 분수광장에 뛰어든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더팩트DB

[더팩트 | 임태순 칼럼니스트] 지난 8월 7일은 입추(立秋)였다. 가을로 들어선다는 말 그대로 입추가 지나니 좀 살 것 같다. 푹푹 찌던 무더위도 밤에는 찬 기운이 감돌아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잠을 잘 만하다. 곧 처서(處暑)가 다가오니 올 여름도 끝물인 것 같다. 새삼 절기의 정직성에 감탄하게 된다.

절기는 중국인이 해와 달의 움직임을 관찰해 만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6개의 절기를 둬 모두 24절기이다. 음력으로 1년이 360일이니 15일마다 절기가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15일마다 날씨를 세분화한 것이다. 여기에 15일을 또 셋으로 나누고 5일마다 날씨를 구분했으니 날씨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대승을 거둔 것도 바람의 변화를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처서가 다가오면서 가을이 성큼 우리 곁으로 왔다. 지난 여름 소나기가 내린 뒤 맑은 날씨를 보이는 서울 구로구 신도림에 있는 도림천에서 나비가 꽃에 다가가고 있다./더팩트DB

기자 초년병 시절 날씨를 담당하다 절기날짜를 몰라 혼이 난 적이 있다. 당시 서울시교육청(지금은 서울시교육위원회)을 출입했는데 시 교육청 청사 옆에 중앙기상대(지금은 중앙기상청)가 있어 시교육청 담당기자는 자연스레 날씨기사도 쓰게 됐다. 어느 날 부서 회식을 가졌다. 신임 사회부장 환영연이었다.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새로 온 부장이 날씨 담당이 누구냐고 물었다.

아마 이 맘 때였던 것 같다. 제가 맡고 있다고 하자 처서가 언제냐고 물었다. 처서가 되면 일교차가 커져 본격적인 가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며칠인지는 몰랐다. 머리를 긁적이자 날씨 담당 기자는 24절기의 날짜를 표시해놓은 책력을 항상 갖고 다녀야 하는데 기본이 돼 있지 않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아마 그 분이 현장을 뛸 때는 책력이 필수 휴대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는 기상대가 일기예보를 하면서 24절기가 언제인지를 알려줘 굳이 책력이 없어도 되는 시절이었다.

아무튼 부장에게 꾸중을 들은 나는 다음날 중앙기상대로 취재를 갔다. 좋은 기사를 발굴해 부장으로부터 실추된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방 저 방을 다니다 누군가 요즘 날씨정보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를 했다. 귀가 솔깃했다. 그 때는 몇 십 년 만에 추위가 왔다거나 또는 몇 십 년 만에 더위가 찾아왔다는 등 극(極)값으로 기사경쟁을 하던 시절이었다.

꽃은 앞을 다퉈 피지 않는다. 제 때를 기다려 피는 꽃밭에서 사진을 찍는 청춘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더팩트DB

그런데 날씨 정보자료란 생소한 것이 있고, 그리고 그 수요가 늘고 있다니 도대체 왜 그런가하는 궁금증이 생겨났다. 취재를 해 보니 날씨 정보자료는 기후자료과에서 발급해주고 있으며 발급 건수도 해마다 큰 폭으로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주로 농사를 짓거나 다리나 도로공사를 하는 건설업체의 수요가 많았다.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내려 피해를 입거나 태풍으로 건설공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 기상청으로부터 해당 기간의 적설량과 태풍이동경로 등 이와 관련된 자료를 받아 보험사나 발주기관에 제출하고 보상을 받는 형식이었다.

또 기업이나 대학에서 사업 또는 연구목적으로 여름, 겨울 등 특정 기간의 날씨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기상정보에 대한 수요가 단순히 날씨 예보에서 상업적 또는 연구 등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트랜드였다. 기사를 작성하자 부장은 의미 있는 기사라며 사회면 머리로 기사를 실었다.

기사가 나가자 중앙기상대장이 다음 날 전화를 걸어 기상대가 날씨예보 외에도 다른 중요한 일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기사라며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며칠 뒤 그와 오찬을 하면서 날씨오보에 따른 고충 등 여러 가지 애환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힘센 기관에서 며칠 뒤 행사를 갖는데 날씨가 어떠냐고 물어 올 때가 난감하다고 했다. 예보가 맞으면 괜찮지만 예보와 달리 비가 오면 기상대가 그것도 모르냐며 면박이나 타박을 듣기 일쑤라고 했다.

그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날씨예보를 잘못해 상부로부터 혼이 났는데 우중충한 하늘을 보고 집 나서던 딸이 ‘아빠, 오늘 우산 갖고 가야 해?’ 하고 물었다. 화가 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소리 지르자 딸이 ‘대한민국에서 아빠가 모르면 누가 알아’라고 말해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다양해지면서 이상기후 등 날씨 정보에 대한 수요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충북지방의 수재에서 보듯 실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상예보다. 이젠 권력기관의 날씨예보에 대한 갑질이나 횡포는 거의 사라졌다. 날씨예보의 정확성에 대한 국민들의 눈높이도 높아진 만큼 기상청은 더욱 기본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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