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특집] "명절음식 도와주는 남자? "그런 인간 없다"

장 보기? 쉽지 않죠 지난 22일 <더팩트>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남문시장을 찾았다. 남문시장에서 명절증후군에 대한 주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장을 직접 보기도 했다. /남문시장=이성락 기자

고통받는 주부들, 얼마나 힘들길래

음력 8월의 보름날인 한가위다. 예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즐거운 날이라지만, 뒤편 어딘가에선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시'댁이 싫어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주부들. 우스갯소리지만 더는 우습게 들리지 않는다. 명절에 주부들이 겪는 극심한 스트레스는 두통, 위장장애, 심하면 호흡곤란까지 일으킨다.

추석 전후로 주부들 사이에선 명절증후군 '극복법' '예방법' 등이 주요 키워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명절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변인들의 관심과 배려를 강조한다. 가족들이 그들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명절증후군이란 말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지난 22일 오후 <더팩트>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 남문시장으로 갔다. 막바지 추석 장보기에 열을 올리는 주부들 덕에 시장은 입구부터 시끌벅적했다. 주부들은 매년 두 번씩 하는 명절 준비에 '단련'이 된 듯 음식 재료를 고르는 솜씨가 노련했다. 하지만 가슴 속엔 응어리가 쌓여있었다.

남문시장 22일 남문시장은 추석 장보기에 열을 올리는 주부들로 북적였다. /남문시장=이성락 기자

"가족들이 많이 도와주나요?"

손사래부터 쳤다. 1시간여 동안 질문한 결과는? 나이를 불문하고 "그런 인간 없다"며 잘라 말했다. 비교적 젊은 주부 몇 명만 "남편이 힘을 북돋워 준다"고 답했다.

오후 3시 취재진은 주부들을 따라 직접 추석 장보기에 나섰다. 추석이 성큼 다가온 듯 시장 분위기는 벌써 명절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성길에 올라야 겨우 추석임을 실감했을 기자에겐 다채로운 풍경이었다. 주부들의 명절은 남들보다 조금 먼저 시작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주부들 틈에 끼여 한참을 허둥지둥했다. 명절 때마다 차려진 밥상만 봐왔던터라 어디서 무엇을 사야 할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일단 시장 옆 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마음을 다잡았다. 물어물어 '장보기 리스트'를 만들고 나서야 안정을 되찾고 다시 장보기를 시도했다.

준비할 것도 많다 차례상에 필요한 제수. /남문시장=이성락 기자

일단 과일부터 살펴봤다. 주인에게 물으니 감, 사과, 배가 기본이라고 했다. 생선도 끝에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차례상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저것 설명을 듣느라 2시간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다. 약과, 송편, 도라지, 황태포 등 사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정육점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이 답답했는지 주부 한 모(40대) 씨가 다가와 사야 할 부위를 알려줬다. 어리둥절해 주뼛거리자 "정육점 아저씨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나무랐다.

"총각이 장 봐서 뭐하게?"

또 다른 주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몇 시간을 배회하는 것 처럼 보여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되물었다. "그래서 뭐할 건데?'

자신 없게 "전도 부치고 소고기뭇국도 만들려고요."

낱개도 팔아 이날 <더팩트> 취재진에게 양파, 무 등을 판매한 남문시장 상인. /남문시장=이성락 기자

오후 6시 23분 남문시장 입구에 쭈그려 앉았다. 점심을 먹고 시작한 추석 장보기는 저녁을 먹을 때쯤 돼서야 겨우 끝났다. 엄살을 보태자면 명절증후군을 겪은 듯 어질어질했다. 육체적 부담이 상당했다.

구입 재료와 양을 최소한으로 줄였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 재료를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집으로 옮기는 것 또한 곤욕이다. 장을 보고 돌아온 어머니가 냉장고보다 소파부터 먼저 찾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예컨대 장을 보는 일은 주부들의 '추석 나기' 5단계 중 1단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주변의 과도한 간섭도, 가족 모두가 먹어야 하는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지만 이날 녹초가 됐다.

어디에 쓰실 건데요? 이날 <더팩트> 취재진은 육전과 소고기뭇국을 만들기 위해 정육점에 들렀다. /남문시장=이성락 기자

주부들이 평소보다 강도 높은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시점은 바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날 만난 주부들은 채소를 다듬고 전을 부치는 일, 또 반복적인 상차림에 무릎과 허리, 어깨가 남아나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오후 8시 집에 도착해 음식 재료를 정리했다. "육전, 어전, 채소전을 하나씩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는 한 주부의 추천에 따라 육전, 명태전, 두부채소전을 부처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뚝딱' 해치울 것이란 예상과 달리 뒤집고 올리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만약 추석날 주부들처럼 가족 모두가 먹는 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노동의 수위는 정말 높았다. 반복적인 노동에 뒷목이 뻐근해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야 했다.

쉽지 않네 2시간여 동안 육전, 명태전, 두부채소전과 소고기뭇국을 만들어 봤다. /독산동=이성락 기자

어느덧 시계추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핏물을 뺀 소고기와 채소, 물을 넣은 냄비를 올려놓은 뒤에야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됐다. 그제야 구부정했던 온몸을 펼 수 있었다.

피곤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모순처럼 들릴 만큼…. 주부들은 아마 이보다 10배, 20배는 더한 가사 노동을 하면서 손님을 맞고 대접하는 감정 노동까지 치른다. 가족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홀로 남아 설거지 등 집 안 청소를 한다.

사람에 따라 명절에 겪는 스트레스가 엄청날 것이라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주부들은 어떻게 하면 즐거운 명절을 보낼 수 있을까.

뻐근 전을 반복적으로 부치니 목이 뻐근했다. 2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구부정했던 몸을 펼 수 있었다. /독산동=이성락 기자

최근 대한의사협회 국민건강위원회는 건강한 한가위를 보낼 수 있도록 명절증후군의 증상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올바른 극복방법 등을 소개했다. 위원회는 몇몇에만 지나치게 편중된 노동량을 지적하며 주부들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말 한마디를 중요시했다.

기자가 하루를 보내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더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였다. 누군가에겐 즐거운, 누군가에겐 슬픈 날이 될 수 있는 게 명절이라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이번 추석 가족들이 오손도손 나눌 대화의 창에 우리의 어머니, 아내가 초대돼 있는지 아닌지를 살펴보자는 것이 이번 취재의 결론이다. 다소 싱거운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몸에 좋길 내심 기대한다. 주부들의 추석 일거리를 다른 가족 일원들이 나눠 담당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자고로 행복은 나누면 두 배,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랬다.

[더팩트ㅣ이성락 기자 rock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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