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김아름 기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검은 모자를 쓴 조선족 피의자는 두 마디만 남긴 채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에게 청부살해를 지시한 또 다른 피의자 2명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15일 또 하나의 미제 사건으로 영원히 묻힐 뻔 했던 '건설사 사장 청부 살인사건'이 경찰의 끈질긴 수사 끝에 검거돼 구속됐다. 사건 발생 7개월 만이다.
이들을 검거한 서울 강서경찰서는 이날 오전 9시 30분께 브리핑을 통해 지난 3월 발생한 방화동 건설사 사장 살인사건에 대한 전모를 공개했다.
◆ '건설사 사장 청부 살인사건', 용역대금 '5억 원' 사건의 결정적 원인
강서경찰서 형사과는 K건설시공업체 경모(59) 사장을 살해하고 도주한 혐의(살인·살인예비)로 조선족 김모(50) 씨와 김 씨에게 범행을 시킨 혐의(살인교사·살인예비교사)로 S건설업체 이모(54) 사장을 구속했다.
또 이 씨에게 김 씨를 소개시켜 준 중간 연결책 경기도 지역 격투기 단체 이사 이모(58) 씨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조선족을 동원해 청부살해를 지시한 피의자가 실제 검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경찰에 따르면 S건설업체 사장인 이 씨는 경기지역 건설관련 토지매입 대행업체를 운영하는 자로 지난해 10월 이 모 이사에게 김 씨를 고용해 법정다툼을 벌이고 있던 K건설업체의 사장인 경 씨를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김 씨는 지난 3월 20일 오후 7시18분께 강서구의 한 빌딩 1층 현관에서 퇴근하던 경 씨를 흉기로 목과 옆구리 등 7차례 찔러 살해한 혐의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지난 2006년 경 씨의 K건설업체와 120억 원 규모의 아파트 신축공사 관련 토지매입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토지를 매입하지 못하면서 계약 미이행으로 파기되자 이후 2009년 12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5년간 경 씨와 민·형사소송으로 다퉈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 씨는 경 씨와 계약파기 후 다른 사람과 계약을 맺고 용역대금 5억 원을 경 씨가 지불해야 한다며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이긴 이 씨는 용역대금 5억 원을 수령해갔다.
그러자 즉각 경 씨가 항소했고 2심과 3심까지 진행된 소송에서 원고패소로 이 씨는 수령해간 5억 원을 경 씨에게 돌려줘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러나 이 씨는 수령해간 돈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경 씨와 이 씨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이 씨는 경 씨의 계속되는 민·형사소송에 "현금 2억 원을 줄테니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하지 말라"고 회유했다.
이를 보고받은 홍 씨가 직접 이 씨를 만나러 왔고 그러자 이 씨는 홍 씨에게 "내가 ○○파 조직폭력배인데 말을 듣지 않으면 작업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후 연결책인 이 씨에게 김 씨를 소개받아 홍 씨를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홍 씨에 대한 살해 지시가 계획했던 것 보다 늦어지자 이 씨는 김 씨에게 "시간 가는데 안 하냐, 변호사 비용도 많이 나오고 회사에 손해가 많다"며 "홍씨를 찾지 못하면 사장 경 씨라도 보내 버려라"고 지시했다.
◆ 4개월간 배회 후 살인…CCTV 작은 점 하나까지 놓치지 않은 추적
홍 씨에서 경 씨로 살해 타깃을 바꾼 김 씨는 4개월간 경 씨의 사무실이 있는 방화동 주변을 배회하며 범행 기회를 엿보다 결국 이날 퇴근길에 나선 경 씨를 살해했다.
경찰 조사에서 김 씨는 "(이들에게) 돈은 받았으나 운동하는 사람으로 차마 사람을 죽이는 게 쉽지 않았다"며 "(이 씨 등에게 경 씨를) 살해하라는 독촉은 계속되고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범행을 하게 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살인을 처음 지시한 S건설업체 사장 이 씨는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연결책인 또 다른 이 씨 역시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폭행만 지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살해 현장 CCTV(폐쇄회로TV)에서 '하나의 점'으로 보이는 인물이 지하철역 방향으로 급히 도망가는 장면을 확인했다"며 "7개월간 주변 120여대 CCTV 영상과 도주로에 거주하는 5800여 명, 금전거래자와 소송상대방 1870명을 탐문하고 걸음걸이 분석 등 과학수사 기법을 활용한 끝에 피의자를 검거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의자 이 씨 등은 조선족 김 씨를 청부살인 교사한 자신들의 범행을 숨기고 수사망을 피하고자 건설업자, 연락책, 실행범 3단계를 거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한편, 경찰 조사에서 조선족 김 씨는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체육을 전공했으며 체육교사로 생활하다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와 이 씨는 과거 체육 관련 일로 중국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으며 S건설업체 사장 이 씨와 연결책 이 씨는 30년 이상 알고 지낸 것으로 밝혀졌다.
beautiful@tf.co.kr
정치사회팀 tf.pstea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