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김아름 기자] '내겐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이제 메말라 없어졌다. 오늘 난 죄책감이란 감정 또한 느끼지 못했다…(중략)…오늘 이 피비릿내에 묻혀 잠들어야겠다.' 영화 속 대사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허구의 세계에서 있을 법한 일, 그러나 허구가 아닌 현실의 사건. '피비린내'를 언급하며 잔혹한 살해를 저지른 '용인 엽기 살인사건'의 범인은 벌행 후 자신의 SNS에 이 같은 글을 올렸다.
갈수록 잔인해지고 흉포화되는 범죄 양상과 수법. 범죄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으며 직군 또한 다양화되고 있다. 일전에 발생했던 '윤 일병 사망사건'과 '김해 여고생 살인사건'이 단적인 예다. 한편에선 모방범죄의 '위험성'과 '심각성'을 지적하며 영화 등 대중매체 확산으로 인한 범죄 정보의 만연과 윤리 의식 약화가 원인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 '용인 살인사건·살인의 추억 ·그놈 목소리 등'…현실로 나타난 영화 속 범죄
# 사례1. '호스텔' 지난해 경기도 용인에서 10대 청소년이 평소 알고 지내던 여성을 성폭행해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피의자인 심모(19) 군은 미리 준비한 문구용 커터칼과 공업용 칼로 시신을 훼손했으며 이후 자신의 집 장롱에 훼손한 시신을 보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체포된 피의자 심 군은 영화 '호스텔'을 언급하며 "(호스텔 같은 영화를) 보면서 살인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 '호스텔'은 2005년에 개봉한 공포 영화로 호스텔에 머무는 여행객들을 잔인하게 고문해 살해하는 것을 즐기는 내용이다.
# 사례2. '친구' 지난 2001년 영화 '친구'가 800만 명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우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때 한편에선 지나친 폭력 장면이 청소년들의 모방범죄를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리고 그 우려는 사실이 돼 그해 10월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1학년 김 군은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경찰 조사 결과 김 군은 범행을 준비하기 위해 영화 '친구'를 40여 차례 관람한 뒤 살해 결심을 굳힌 것으로 드러났다.
# 사례3. '그놈 목소리' 지난 2007년 당시 8살이던 박모 군이 유괴범에게 납치돼 싸늘한 시신이 돼 부모 곁으로 돌아오는 인천 어린이 유괴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과 박 군의 아버지는 그해 개봉한 '그놈 목소리'와 범행 수법이 비슷해 '그 범인이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했다고 전한다. 이 영화는 1991년 발생한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로 전국 관객 360만 명을 넘기며 흥행에도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성공 이면에 전주에서도 이 영화를 보고 납치 자작극을 벌이는 등 모방범죄도 잇따랐다.
# 사례4. '살인의 추억' 지난 2007년 화성에서 한 달 사이 부녀자 3명이 잇따라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실종된 사람은 노래방 도우미 2명과 모기업 직원으로 이들은 전부 비봉IC 주변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지역 주민들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 아니겠냐며 두려움에 떨었으나 수사당국은 "연쇄살인 사건과 무관하다"고 일축했다. '살인의 추억'은 1991년 4월부터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으로 화성시 동탄면의 한 야산에서 6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이후 모두 10명이 잇따라 살해된 사건을 그린 영화로 현재까지 미세사건으로 남아있다.
이 밖에도 지난해 7월엔 20대 남성이 범죄 영화를 모방, 범행 후 옷을 갈아 입는 등 경찰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지난 3월엔 한 공익근무 요원이 '유영철'을 롤모델로 어머니와 다툰 후 서울 서초구 한 빌라 앞에서 귀가하던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는 애초 범행 대상으로 어린이, 여자, 노인 등 7명을 선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 '모방범죄' 자극적 언론보도와 심리적 요인의 결합…예방책은?
영화 및 폭력 영상물 등을 바탕으로 자신이 보았던 범죄의 장면을 그대로 따라 하며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로 '용인 엽기 살인사건'발생 이후 그 심각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선 모방범죄 현상을 대중매체 확산과 더불어 생겨난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지적하면서 방송 등 범죄에 대해 더 자세히 깊이 있게 다룰수록 그 발생 빈도와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특히 심리적 요인으로 호기심과 영웅심리, 자제력 결핍은 물론이고 범행에 대한 자기 합리화도 한몫 한다.
지난해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이 실시한 전국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 '폭력적인 문화 및 매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응답이 16.4%를 차지하며 범죄에 '매체 영향'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곽대경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22일 <더팩트>와의 통화에서 모방범죄는 개인적 가치관(성향)과 환경적 요인 등이 결합돼 발생하는 범죄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모방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특징은 '저 사람도 했기 때문에 내가 해도 무방하다'라는 자기 합리화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보니 피해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나 죄책감도 보통 사람들에 비해 덜하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는 경향도 크다"고 설명했다.
예방을 위한 제도적 장치 등 방안 여부에 대해 곽 교수는 "스마트폰 등 통신기기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손바닥 안에서 모든 정보를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이가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해 매체를 완벽하게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그러나 유해매체를 발견하게 될 경우 누리꾼 스스로가 이를 신고해 폐쇄토록 해야 하며 기술적인 부분의 개발도 필요하다. 또 어린시절부터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준법 의식을 생활화하도록 올바른 교육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모방범죄를 포함해)모든 범죄의 예방은 다자간의 협력을 통한 적극적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관계자도 취재진과 통화에서 "잇따라 발생하는 모방범죄들 대부분이 '영화와 언론 등 매체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더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폭력을 내보내면서 이를 본 사람들이 모방하도록 하는 점이 문제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성숙한 청소년은 모방범죄에 더 쉽게 노출될 수 있고 발생 가능성도 높다"며 곽 교수와 같은 의견을 냈다.
이어 "(언론과 영화, 대중매체 등에서) 자세한 범죄 묘사는 외부로 반응했을 경우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지만, 내부적으론 자살이나 자해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윤리 강령 등을 무시한 언론 보도와 상품화에만 초점을 맞춘 영화 등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염두에 둬야 하며 모방범죄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최근 아이돌 가수 등 연예인을 비롯해 공인들이 방송에 나와 '과거 가출을 했다'거나 '자살 경험이 있다' 등의 자극적인 사생활 노출을 자랑삼아 말하는데 이또한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